지휘 프랫(캐디), 연주 박희영… 그린 위의 2중주

나상욱(미국명 케빈 나)이 지난 10월 초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데뷔 8년 만인 211번째 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TV로 보며 박희영(24)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눈물을 글썽였다.

'나상욱 프로는 8년 만에 우승했지만 나는 4년밖에 되지 않았잖아.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이렇게 마음을 다잡는 박희영의 어깨를 캐디 카일리 프랫(34·호주)이 가볍게 다독였다.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이들은 2009년 여름 에비앙 마스터스에서 처음 호흡을 맞췄고, 지난 시즌엔 헤어졌지만 올 1월부터 다시 동고동락한 동지이자 친구였다. 미 LPGA 2부 투어에서 5년간 뛰었지만 끝내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선수생활을 그만뒀던 프랫에게는 박희영의 꿈이 곧 자신의 꿈이기도 했다. 프랫은 최혜정과 유선영·허미정의 골프백을 멘 적이 있어 골프에 모든 걸 거는 한국 선수들을 잘 이해했다.

◇캐디 프렛과 함께한 '18홀 여행'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지 않은 21일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그랜드 사이프레스골프장(파72). 박희영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시즌 마지막 대회인 CME그룹 타이틀홀더스 4라운드를 산드라 갈(독일)과 7언더파 공동 선두로 출발했다. 2008년 LPGA 투어로 건너온 뒤 박희영의 96번째 대회였다. 박희영은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는 3승을 올렸다. 2005년 KLPGA 신인왕에 오른 그는 동료 선수들로부터 '가장 스윙이 좋은 선수'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미 LPGA 투어에서는 우승이 없었다. 톱10에 19차례나 들었지만 2009년 혼다 클래식과 미즈노클래식에서 2위에 오른 게 최고 성적이었다.

박희영은 4번홀(파3)에서 보기를 하며 2위로 밀려나자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때 캐디 프랫이 "이제 올 시즌도 14홀밖에 안 남았네. 이것만 잘하고 가면 우리도 푹 쉴 수 있잖아"라고 말을 건넸다. 절박한 상황과 동떨어진 이 한마디는 박희영의 긴장을 풀어줬다.

박희영은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눈앞에 있는 한 샷 한 샷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박희영과 프랫은 '시즌 종료'를 향한 카운트다운을 하면서 한 홀씩 '둘만의 여행'을 펼쳤다. 리더보드는 바라보지 않았다. 컴퓨터 같은 정확성을 자랑하던 박희영의 샷도 살아났다. 5번(파4), 6번(파5), 8번(파3)홀 버디. 갈이 8번홀에서 보기를 하면서 둘의 격차는 3타차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올해 3월 KIA 클래식에서 신지애를 상대로 1타 차 역전 우승을 했던 갈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13·14번홀에서 연속 버디를 잡아 1타차로 바짝 따라붙었다. 기세를 올리던 갈은 15번홀(파5)에서 1.5ｍ 파 퍼트를 놓치며 주춤했다. 박희영은 마지막 18번홀(파4)에서 두 번째 샷이 그린 왼쪽 배수구 쪽으로 날아가 잠시 위기를 맞았지만 침착하게 세 번째 샷을 홀 1ｍ에 붙였다. "땡그랑." 챔피언 퍼팅을 성공하고나서 박희영은 캐디 프랫과 감격의 포옹을 했다. 프랫은 "거봐, 네가 꼭 해낼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라고 말했고, 박희영은 "이건 우리가 해낸 거야"라고 했다. 박희영은 9언더파 279타로 공동 2위인 갈과 폴라 크리머(미국)를 2타차로 제치고 첫 우승을 차지하며 상금 50만달러를 받았다. 이번 시즌 내내 벌었던 35만1781달러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경쟁자 산드라 갈 축하에 눈물 터뜨려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박희영은 18홀 내내 치열한 경쟁을 벌인 갈이 다가와 포옹하자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갈은 "오늘 너는 정말 잘했고, 내가 봐도 멋있었어. 축하해 챔피언"이라고 속삭였다. 박희영과 갈은 데이비드 레드베터 스쿨 수석코치인 앤드루 파크(남아공)에게서 함께 스윙을 배우고 있다.

박희영은 마지막 라운드 시작 전에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만난 크리스티 커(미국)가 "'희영, 너는 할 수 있다'고 격려해줘 큰 힘이 됐다"고 했다. 올해 LPGA 신인왕에 오른 서희경은 저녁식사 때 꽃다발을 들고 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박희영은 "지난 4년간 주변에서 '왜 우승이 없느냐'고 많이 물어 왔지만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며 "이번 우승이 앞으로 내 인생을 바꿔놓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박희영은 22일부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시드전 본선에 도전하는 동생 박주영(21)에게도 응원 메시지를 전했다. 박희영은 "늘 응원해주신 아버지(박형섭 대림대 교수)께 감사 전화를 드렸다"며 "동생도 중요한 경기에서 좋은 결과를 얻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희영은 4년째 지원하고 있는 하나금융그룹에도 감사 전화를 했다.

박희영은 골프장 인근 맥줏집에서 LPGA 선수, 캐디들과 함께 우승 축하 겸 시즌 종료 파티를 했다. 최근 로레나 오초아 인비테이셔널대회 때 방문한 멕시코에서 구입한 테킬라로 축배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