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내 인생] 전업주부에서 평생교육기관 한글 교사 된 유영자(58)씨

"이날 이때까정 글자도 모르고 살았당께. 한 풀어볼라고 서울 왔응께 열심히 가르쳐주쇼 잉. 외상 장부 못 적어 날린 돈이 숱하당께."

까막눈의 할머니가 교실 문을 두드렸다. 전남 여수에서 국수가게를 한다는 할머니는 평생 글을 못 읽어 당한 설움이 너무 크다고 하소연했다. 더 늙기 전에 한글을 깨쳐야겠단 생각에 가게 문을 닫고 서울 딸네 집으로 와서 주부학교를 찾은 거였다. 또 다른 중년 부인은 여태 노래방 한 번 간 적이 없단다. 화면 가득 쏟아지는 가사를 못 읽어 친구들에게 한글 모르는 걸 들킬까 봐 두려워서였다. 식당에 가면 메뉴를 못 읽어 평생 옆 사람이 시키는 음식을 들은 뒤 "나도 똑같은 거"라고 되풀이했다는 할머니도 있었다.

한글을 몰라서 서럽게 산 이들, 무지(無知)가 들통날까 봐 마음 졸이고 살아온 이들…. 내가 매일 마주하는 소중한 제자들이다. 나는 서울 양원초등학교의 평생교육시설에서 한글을 가르친다. 배움에 목마른 할머니들을 위해 분필 가루 마시며 목이 쉴세라 '기역니은' 외친다. 쉬는 시간이 아까워 두 시간 연속으로 수업한다.

내가 이렇게 열정을 다해 가르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몇 해 전 바로 그 자리에 내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남 고흥에서 팔남매의 일곱째로 태어나 초등학교만 나왔다. 선생님이 꿈이었던 터라 어떻게 해서라도 학업을 잇고 싶어 야학으로 중학교에 다녔지만 정식 졸업장은 없다. 형제 중에서 제일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가난 앞엔 도리가 없었다.

결국 가난을 벗어나려고 열여덟살에 언니 오빠를 따라 상경했다. 그때 언니를 따라가 겨우 얻은 일자리가 여공(女工)이었다. 삼각지 근처에 있는 작은 공장이었는데 칵테일에 장식으로 꽂는 작은 우산을 만드는 일을 했다. 오후 6시에 출근해 빵 하나 먹고 밤을 꼴딱 지새운 뒤 다음날 오전 6시에 퇴근하는 일상이었다. 그러다 재봉틀을 배워 평화시장에서도 일했고 사무실 경리로도 일했다.

고된 나날 속에도 내 머릿속엔 온통 공부 생각뿐이었다. 작업대에 앉아 있을 때도 머릿속엔 책이 어른거렸다. 하지만 발 딛고 있는 현실은 이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그러다 결혼해 시어머니를 모시고 아이 둘까지 키우다 보니 공부에 대한 미련은 자연스레 사라져갔다.

그런데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서 당황스러운 순간이 종종 생겼다. 학기 초만 되면 부모의 학력과 가정형편을 묻는 가정환경 조사서를 제출해야 했다. 아이들이 혹여 상처를 받을까 봐 엄마 학력란엔 언제나 '고졸'이라고 써넣었다. 그 순간만 되면 못 먹을 걸 삼킨 것처럼 목이 턱 막혔다. 육아로 인해 뒷전으로 밀렸던 배움에의 열정이 그때마다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던 1994년 어느 날 학부모 모임에서 만나 내 사정을 훤히 알고 있던 아이 친구 엄마가 내게 주부학교를 권했다. 마침 모시고 살던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뒤라 여유가 있을 때였다. 용기를 갖고 주부학교를 찾았다. 30여년 만의 공부는 정말 재미있었다. 교과서가 너덜너덜 찢어질 때까지 외우고 또 외웠다. 중학교·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잇달아 통과했고 내친김에 1999년 방송대에 들어가 국문학을 전공했다. 둘째 아들과 같이 '99학번' 새내기가 됐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향학열은 그칠 줄 몰랐다. 결국 다시 양원주부학교로 돌아와 평생부에서 소일 삼아 공부했다.

단 하루도 결석하지 않고 공부하는 내 모습을 보고 하루는 교장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혹시 우리 학생들 한글 가르치는 일 안 해볼래요? 그 누구보다 이분들의 절실함을 아시잖아요." 꿈만 같았다. 어릴 적 싹도 틔우지 못한 꿈이 '선생님' 아닌가. 정식 교사는 아니었지만 내가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됐다. 그렇게 2004년부터 국어 교사를 시작하게 됐다.

수업 첫날 학생들에게 나는 늘 말한다. 몇 해 전만 해도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고.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몇 년 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을 거라고. 이름 석 자도 못 쓰던 할머니들이 나에게 희망을 얻어 이름은 물론이고 주소까지 배워간다. 마디마디 쭈글쭈글 굵은 주름이 잡힌 손으로 연필을 꽉 움켜쥐고 한 자 한 자 써내려가는 만학도(晩學徒)들을 보며 세상 그 어떤 일과도 비견할 수 없는 보람을 느낀다. 내 인생의 2막은 이렇게 하루하루 영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