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는 시들지 않는 꽃… 작품 완성하는 건 여배우"

여배우는 '신기루' 같은 존재다. 손만 뻗으면 잡힐 듯하고 사랑에 대한 갈망도 채워줄 것만 같지만 현실은 그렇질 못하다. 그런 전설의 여배우들을 오늘 느끼고 호흡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한국영상자료원(원장 이병훈)이 11월 한 달간 마련한 '여배우열전'이다. 1930~80년대 여배우 28명의 대표작 42편이 상영된다. 일제시대에 활동한 문예봉서부터 최은희, 김지미, 문희, 윤정희, 정윤희, 고은아, 장미희, 강수연까지 당대를 풍미한 여배우들이다.

이들 가운데 최은희(85)와 고은아(65)를 22일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에서 만났다. 최은희는 "1965년 고은아가 갓 데뷔했을 때 정진우 감독이 나에게 '당신과 꼭 닮은 배우가 있다'면서 소개시켜줬다"고 했다. 정진우 감독의 '가을에 온 여인' 중 최은희가 피아노 치는 장면에서 흘러나온 곡은 고은아가 대신 연주했던 것이라고 한다.

―'여배우 열전'을 맞는 소회는.

최은희 "배우로서 활동은 하지 않고 있지만 '내가 아직 여배우라는 타이틀을 잃지 않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은아 "기획전이 열리는 걸 신문 보고야 알았어요. 쑥스럽죠. 그래도 여배우를 했던 시간이 저를 평생 따라다니는구나 싶어요."

―영화에서 '여배우'란 어떤 존재일까요.

최 "한마디로 시들지 않는 꽃이에요. 여배우는 시들면 안 돼요. 항상 사람들한테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게 여배우 아닌가요."

고 "여배우는 미의 극치 혹은 가장 미에 근접한 존재가 아닐까요. 스토리, 연출과 연기가 좋은 영화를 아름답게 완성시켜주는 건 남자 배우보다는 여자 배우의 몫이죠."

―활동 당시와 지금의 여배우들을 비교한다면.

최 "예전엔 달리 즐길 게 없으니까 대중의 관심이 영화와 배우로 집중됐죠. 게다가 여배우가 귀한 시절이라 한번 인기를 얻은 사람들이 계속 영화에 출연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땐 '여배우 트리오'가 있었던 거죠."

고 "인기가 몇 명에게만 몰리다 보니 겹치기 출연이 예사였어요. 저도 10편을 동시에 촬영했던 기억이 나요."

최 "전 (남편인) 신(상옥)감독님 때문에 겹치기는 4편 정도밖에 안 했어요. 그것도 몰래 한 거지만. 당시엔 어딜 가도 이목이 집중되니까 언제나 여배우로서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했어요."

―활동 환경도 많이 달라졌죠.

고 "우리 고생 많이 했어요. 지금이야 다들 매니저, 코디네이터에 헤어·메이컵 담당자까지 함께 다니지만 그땐 대부분 차도 없어서 조명기계 실은 트럭 뒤에 타고 이동하기도 했고, 머리와 화장도 배우가 직접 했어요."

최 "현대극 촬영하다가 사극 촬영하러 가는 길에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혼자 머리를 땋았던 생각이 나요. 요즘 여배우들한테 그렇게 하라면 다들 도망갈걸요."(웃음)

―아까 말씀하신 '여배우의 품위'라는 게 뭘까요.

최 "색안경을 쓰고 여배우를 보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야하게만 보는 사람들도 있고요. 이런 사람들의 기준까지 다 맞출 순 없지만 '나는 여배우다'라는 생각으로 대문간에 나갈 땐 몸가짐을 조심했어요. 지금 이 나이가 돼서도 그건 마찬가지예요."

고 "여배우는 화려하지만 삶에 대한 진지함이 없다는 선입견이 있잖아요. 여배우이기 때문에 더 진지하고 옹골찬 속내가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 사이의 괴리감을 줄이고 내 삶에서 중심을 잡으려는 게 바로 품위와 자존심을 찾는 것이죠."

―두 분 다 연기활동은 접었습니다.

고 "언젠가 연기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시점이 왔어요. 전 원하지 않았지만 여배우의 길을 걸었고, 노력한 것 이상으로 사랑을 받았어요. 그 사랑을 돌려주기 위해 '행복한 나눔'과 같은 사회적 기업을 만들었어요."

최 "연기는 그만뒀지만 언제나 여배우라는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어요."

―할리우드에는 환갑 넘어서도 주연으로 활동하는 여배우가 있는데요.

고 "우리도 할리우드처럼 산업 규모가 커지고 다양한 영화를 받아들이는 관객층이 생기면 가능하겠죠. 지금은 일단 나이 든 사람이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로는 돈을 벌 수가 없으니까요."

최 "영화계엔 나이 먹은 사람을 버리는 풍조가 있죠. 나는 기여할 준비가 다 돼 있는데 그걸 받아주는 곳이 없죠. 학교에서 영화 역사 같은 것을 가르치지 않으니 젊은 배우들도 우리를 못 알아보고 인사조차 안 해요."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여배우를 꼽는다면.

최 "한은진(1918~2003) 선배. 저에게 분장부터 의상까지 모든 것을 가르쳐준 분입니다. 연기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바느질, 음식 솜씨까지 다 갖춘 만능 여배우였어요."

고 "최은희 선배요. 여배우의 자존심과 배우의 장인정신이 존경스러워요. 요즘 여배우들 중에선 전도연씨와 김혜수씨에게서 이런 자존심이 보여요. 자기 색깔이 강한 배우라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후배 여배우들에게 해주실 조언은.

최 "여배우는 선택된 대상이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는 결코 가볍지 않아요. 그래서 한때의 깜짝 스타로 끝나는 게 아닌 굵은 선을 가진, 묵직한 배우로 남아야 해요."

고 "인생은 길고, 화려함은 굉장히 짧아요. 내가 걷는 발걸음이 땅을 딛고 있는지, 혹시 허공에 떠있는 건 아닌지 언제나 확인해야 해요. 땅을 밟고 걸어간다는 걸 인식한다면 여배우로서의 자신감과 자존심을 지키며 살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