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유로존, 독일의 도움만 기대할 뿐

"독일의 탱크나 러시아의 미사일보다 우리나라 안위를 위협하는 건 유로존의 붕괴다. 독일만이 유로존(유로화를 사용하는 17개국)을 도울 수 있다. 독일을 빼곤 아무도 여력이 없다."

폴란드의 라덱 시코르스키 외무장관은 28일(현지시각) 다급한 심정을 FT(파이낸셜타임스)에 실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건 역대 폴란드 장관 중 내가 처음일 것"이라며 "나는 독일이 무섭지만 (재정 위기에도) 움직이지 않는 독일이 더 두렵다"고 말했다.

현재 유로존 가입을 준비하는 폴란드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독일 나치군의 침공을 경험했다. 그런 폴란드도 재정 위기가 심화되자 '독일 역할론'에 힘을 싣고 나선 것이다.

◇독일 '재정 체질 개선' 원칙론 고수

독일은 튼튼한 제조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ECB(유럽중앙은행)에 가장 많이(27%) 출자한 '유로존 우등생'이다. 하지만 ECB가 적극적으로 재정 위기국의 국채를 사들이는 것과 유로존이 공동으로 채권을 발행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반대한다. 모두 독일의 '혈세'를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독일은 "재정 위기국들이 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27일 외신기자회견에서 "독일은 유로존 위기를 지원할 만큼 큰 나라가 아니다"며 "유로존이 별도의 '안정연합(Stability Union)'을 맺어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은 이 안정연합을 통해 1997년 도입된 안정성장협약을 더 철저히 지키자고 주장한다. 안정성장협약이란 유로존 회원국들끼리 '재정적자는 GDP의 3% 이내, 국가부채는 GDP의 60% 이내'로 유지해 재정의 건전성을 지키자고 약속한 원칙을 말한다. 하지만 2003년 이후 30건 넘는 위반 사례가 있었고, 이에 대해 단 한차례 제재도 가하지 못했다.

독일은 '안정연합'을 통해 회원국들이 기준을 위반하면 자동 제재를 가하자고 제안했다. 기준을 어긴 정부는 유럽사법재판소에 제소되는 식이다. 외신들은 프랑스도 독일 방안에 합의한 것으로 전했다.

◇'주권 침해' 'EU 분열' 반발도 제기

유로존 회원국의 재정 주권을 양도하는 내용을 담은 독일 방안에 대해서는 반발도 적지 않다. 지르키 카타이넨 핀란드 총리는 28일 "(독일의) 그런 시스템이 좋은 방법이 아니다"며 "지지를 받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핀란드는 안정성장협약 기준을 충족할 정도로 재정이 튼튼하지만 재정 주권을 간섭받는 데 대해서는 거부감이 크다.

유로존이 별도의 협약을 맺을 경우, EU가 유로권과 비유로권으로 쪼개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장클로드 융커 유로 재무장관회의 의장은 "EU는 인위적으로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EU는 독일과 프랑스가 비밀리에 협의한 것에 경고를 보내며 "제약 없이 6개월간 공개 협의를 갖자"고 제의했다.

일부 회원국에서 "EU를 '독일화(Germanic)'시키려는 것이냐"는 지적까지 나오자 쇼이블레 장관은 "지중해 국가들은 독일이 될 수 없고, 유럽이 독일어를 쓰게 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총리실도 "독일은 유럽 각국과의 유대가 돈독하며 유로 위기 해결에 이미 엄청난 재원을 투입했다"며 진화에 나서는 모습이었다.

이같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재정 규율을 강화하는 독일 방안으로 해결책이 모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이선엽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재정에 대한 통제가 가능해지면, 독일이 남유럽 회원국의 예산과 정부부채에도 간섭할 수 있게 된다"며 "그렇게 되면 손실을 우려해 지원을 꺼렸던 ECB도 국채 매입에 한결 쉽게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다음 달 9일 EU 정상회의까지 이러한 방안들이 치열하게 논의될 것으로 전망했다.

☞ 안정성장협약(Stability and Growth Pact)

1997년 6월 유로존 국가들이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할 원칙을 천명한 협약. 회원국의 재정 적자 비율을 GDP의 3% 이내로, 정부부채 규모를 GDP의 60% 미만으로 제한한다. 원칙을 어긴 국가에 벌금을 부과할 수 있지만, 실제로 제재한 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