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반찬가게 40년, 情을 퍼준 당신은 '달인'

서울 종로구 예지동 광장시장 한복판. 시끌벅적한 소리 속에 '순희네 반찬가게' 추귀순(여·63) 사장 목소리가 도드라진다. 상대는 일본인 관광객. 추씨 입에서 연방 "서비스, 서비스"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나가노에서 온 시에코 이마무라(53)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마무라씨는 푸짐하게 담은 게장과 명란젓 등 5만원어치를 사고 추씨가 건넨 요구르트를 마시며 흡족한 표정으로 가게를 떠났다.

1969년부터 광장시장에서 장사해온 순희네 반찬가게. 마늘장아찌, 콩자반, 창란젓, 꼴뚜기젓갈, 양념게장, 고들빼기, 멸치조림, 무장아찌 등 40여 가지 반찬을 늘어놓고 행인을 유혹한다. 순희는 추씨 첫째 딸 이름.

'순희네 반찬가게'는 서울시가 전통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뽑은 '시장 달인 이야기' 주인공 중 한명이다. 광장시장에서는 '순희네'와 함께 폐백음식 명가 '동보혼례방', 야채가게 '수원상회'가 선정됐다. 상인은 아니지만 시장 명물인 '색소폰 할아버지' 백연화(88)씨도 들어갔다.

◆정(情)을 파는 반찬가게

방배동에서 온 민은식(77)씨가 명란젓을 고르며 "하나 더 넣어. 한두 번 사는 것도 아닌데"라며 눈을 흘기자, 추씨는 "아이고 알았어, 얘야 팍팍 퍼드려라"고 사위를 부추겼다. 10년째 '순희네' 단골이라는 민씨는 "아유, 한 번 맛보면 다시 찾게 돼요"라며 "주인장 인심이 좋아 자꾸 온다"고 했다.

'순희네'는 시장 내에서 '퍼주세요' 가게로 더 알려졌다. 손님이 더 달라면 정성껏 담아주기 때문이다.

목포 출신으로 열여덟 살 때 상경해 그때부터 광장시장에서 반찬거리를 팔았다. 스물한 살 때 지금 가게를 차렸다.

40년 넘게 광장시장에서 반찬가게를 지켜온 비결은 뭘까. 그는 "손님들 속여가면서 팔아봤자 양심이 보고 있는데 결국 다 돌아온다"고 말했다. 하루 40~50명 오는 고객은 대부분 단골이며, 배우 김지미씨와 가수 노영심씨도 가끔 들른다고 한다.

◆광장시장을 지키는 사람들

'순희네' 말고도 광장시장 명물은 꽤 있다. '동보혼례방'은 1964년부터 2대째 가업을 이어오는 폐백·이바지 음식 전문점이다. "어르신들 까다로운 입맛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싸구려 재료를 써서 싸게 팔아봤자 금방 소문이 난다. 이익을 줄이고 만족하는 재료로 만들어 팔아야 두 다리 쭉 펴고 잘 수 있다"는 게 창업자 때부터 내려온 철칙이다.

6·25 전쟁 직후부터 야채가게만 60년째 고집하는 '수원상회'. 깻잎, 시금치, 미나리, 상추, 신선초, 자소엽 등 70여종 잎사귀 채소를 판다. '식재료 만물상'이란 간판답게 통조림, 곡물, 해조류, 조미료, 건조식품, 음식용 약재까지 취급한다. 박정희 정부부터 노무현 정부까지 청와대에도 채소를 공급했다는 게 자랑거리다.

광장시장을 저녁때 찾았다면 한번쯤 마주쳤을 법한 백연화옹. 청소년기 유랑극단과 5일장을 따라다니며 잡일을 거들다 뒤늦게 색소폰을 구해 연주생활을 시작했다. '거리의 악사' 생활만 30년째. 제복과 군화, 모자를 차려입고 종로1가 빈대떡 골목에서 낙원상가, 탑골공원 그리고 광장시장을 돌며 '갈대의 순정' '울고 넘는 박달재' 등을 연주해주고 돈을 받는다. 기껏해야 1000원 정도지만 "먹고 사는 데 지장 없다"고 백씨는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