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써서 배우들 때렸지만 카메라로는 그들을 감쌌죠

가장 아끼는 사진은 고(故) 이해랑 선생이 배우 유인촌에게 연기 지도를 해주는 사진이다. 대부분의 연출가가 연기 지도할 때 극장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혼낸다. 하지만 이해랑은 연기를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가만히 배우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말했다. "그렇게 하면 안 돼."

이태주씨는 "연극박물관과 도서관이 반드시 생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가진 자료는 국립예술자료원에 기증해 오래 남기고 싶다고 한다. '얼굴' 전(展)은 18일까지 열린다. 1일 오후 2시에는 함께 출간되는 '한국 연극―전환시대의 질주' 출판기념식을 같은 장소에서 연다. (02)742-9870

1966년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청년은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마침 일본을 들른 김에 일제 카메라를 한 대 샀다. 타향에 가니 쓸모가 있겠지 싶었다. 그 카메라가 한국 연극사 40년을 담는 보물이 됐다.

40년간 만난 연극인의 일상을 담은 사진전 '얼굴'을 1일부터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로비에서 여는 평론가 이태주(74)씨. 그는 28일 "오직 기록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40년간 매일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다"고 말했다.

"미국에 갔더니 연극이 문화를 만드는 무서운 힘이었어요. 머리를 얻어맞은 듯 깨달음이 왔죠." 하와이대 동서문화연구소를 거쳐 워싱턴DC 조지타운대에서 한 학기를 수학한 후 진로를 바꾸기로 결심한 그는 귀국해 연극 평론에 뛰어들었다. "평론은 탐색에서 시작하잖아요. 연극인의 무대 활동을 이해하려면 개인 생활을 알아야 하죠. 그래서 같이 어울리다 보니 사적인 모임에 자주 가게 됐어요. 그럴 때마다 카메라를 갖다댔죠." "보고, 쓰고, 마시고, 찍는" 인생의 시작이었다.

1970년부터 그의 카메라는 수많은 필름을 토해냈다. 연습장, 뒤풀이 식당, 연극인들의 집과 뒷산까지…. 그는 한국연극학회장·한국연극평론가협회장·서울시극단장 등을 맡으면서도 끈질기게 셔터를 눌렀다. 지금은 자택의 방 하나를 필름이 차지할 정도. "세보진 않았지만 수만장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전시할 사진을 고르느라 혼났어요. 정신없이 찍어서 이번에 고르면서 '이 사람도 찍었구나'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전시작은 모두 150점. 연극인 등 문화예술계 인사 160명의 얼굴이 담겼다. 작고한 이해랑, 김동원, 차범석은 물론 장민호, 이순재, 전무송, 박정자, 손숙, 최치림, 손진책, 윤석화, 신애라 등 반가운 얼굴의 수십년 전 모습이 가득하다.

"예전 배우들은 평론가를 '이빨'이라고 불렀어요. 항상 씹어댄다는 뜻이었죠. 그래도 내가 카메라를 대면 외면하지 않았어요. 기록하겠다는 마음은 애정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는 지난 40년이 "평론으로 욕하고 카메라로 감싸면서 지나온 세월"이라고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