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국내 최대 농민단체 '한농연' 김준봉 회장

공고 졸업 후 집안 농사 물려받아 노총각 때 중국 동포 여성과 결혼 농사 규모를 키울수록 빚이 쌓여

“주부들 값싼 농산물 좋아하지만 뼈 빠지게 농사짓는 농민 생각을” 칠레 포도는 겨울에 들어와 무사


"당신은 왜 시위에 참여하지 않나?"

단단한 체구의 김준봉(52)씨를 만났을 때, 내가 시위 선동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국내 최대 농민단체인 한농연(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 회장이다. 전국 영농후계자 12만명이 소속돼있다. 그도 경북 상주에서 공고를 졸업한 뒤 집안 농사를 이어받았다.

―서울 도심에서는 한·미 FTA 반대 시위가 계속된다. 마땅히 앞장서야 하지 않는가?

"그 시위는 민노당, 민주노총 등이 주도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농업 대책도 바쁜데."

―전농(전국농민총연맹)은 참여하고 있지 않나?

"전농은 민주노총에 가입된 단체다. 나름대로 자기들 입장이 있을 것이다."

―한농연 소속 회원들은 같은 농민 아닌가?

"우리도 전에는 반대했다. 삼보일배도 하고 여의도에서 반대 집회도 열었다. 별짓을 다 했다."

―지금 와서는 왜 안 하나?

"기습 처리든 어쨌든 통과된 것이다. 대통령이 서명까지 했다. 폐기 주장이 나오는데 국가 간 협정을 맺어놓고 가능한 소리가 아니다. 이제는 대책이 중요한 시점이다. FTA를 무조건 반대한다는 주장이, 우리끼리만 먹고사는 나라라면 몰라도, 국민적 호응을 얻을 수 있겠나."

―FTA가 시대 흐름에서 불가피하다고 보는가?

"농민도 국민이다. 우리나라는 통상(通商)으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안 할 수 없다. 국가 경영상 불가피하다는 걸 안다. 다만 농업 부문에서 피해가 가장 크다. 대책을 세워주고 최소한 소득 보장을 해줘야 한다. 우리가 반대해온 것도 그런 피해 대책을 더 받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농민도 같이 살아야 하지 않는가."

―우리 사회에서는 강경 투쟁을 안 하면 '어용'이니, 정부와 결탁됐다는 소릴 듣는다.

"나는 2000년 농가 부채 대책을 요구하며 처음으로 경부고속도로를 점거 농성했다. 매스컴에서는 농촌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사생결단을 해보자는 심정이었다. 그 뒤 상경 투쟁할 때 내가 상주에서만 버스 98대와 3000명 이상 동원했다. 행동대장이었던 셈이다. 나보다 투쟁을 앞세울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띠를 두른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소속 농민 회원들도 동의하나?

"대책을 요구하고 협의로 풀어가자는 게 우리 방침이었다. 지금 시위는 너무 막무가내다.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농수축산연합회 대표 모임에서도 '현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휩쓸리는 것을 경계한다'는 의견을 모았다."

―전농에서 한농연의 이런 입장을 비판하지 않나?

"한 번도 그런 적 없다. 얼마든지 토론할 수는 있다. 세월이 지나면 누가 옳은지 평가가 나올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한·미 FTA로 농수축산업 분야에서 15년간 모두 12조6683억원의 피해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국내 농업 기반이 완전히 무너질 것으로 보나?

"예측은 하지만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 없다. 아직 닥쳐보지 않아서."

―2004년 칠레와 FTA 때 포도 시장이 개방되면 국내 농가가 다 망한다고 했다. 하지만 농가의 생산량은 늘고 포도값은 올랐다.

"칠레와는 농사 시기가 다르다. 칠레 포도는 겨울과 봄에 들어오니까, 계절적으로 충돌하지 않으니까 무사했다. 이번 한·미 FTA와 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농업의 어느 부문이 가장 취약한가?

"미국은 소떼를 초지(草地)에서 사육하는 축산 대국이다. 우리는 경쟁이 안 된다. 나도 축산을 해봤는데 곡류 사료에 의존하니 생산비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 한우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규모도 영세하다. 그동안 체질 개선하고 경쟁력을 키웠다지만 체급이 다르다."

―3년 전 광우병 사태 때 '미국 소고기가 들어오면 한우 농가 다 망한다'고도 했다. 막상 미국 소고기가 들어왔지만, 경제적 여유가 있는 소비자들은 '맛이 다르다'며 한우를 찾았다. 한우는 시장 경쟁에서 밀리지 않았다. 품질과 안전성을 따져 지갑을 열기 때문이다.

"그때 소고기 개방이 이뤄졌지만 고급육 수입에는 제한이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개방이 확대되기 때문에 고급 품목들이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시장 상황이 달라진다. 쌀 문제도 그렇다. 미국의 고급 쌀과 결코 쉽지 않은 경쟁을 해야 할 것이다."

―개방하지 않았을 때 농촌은 살 만했다고 할 수 있나?

"내가 농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개방이 되면서 달라졌다. 작년에 배추 파동이 났다. 잦은 비와 병충해로 배추 출하가 좋지 않았다. 배추값이 크게 뛰어 일부 농가에서는 돈을 벌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 농가는 배추 수확이 적어 손해를 많이 봤다. 배추 공급량이 줄자, 정부는 곧 물가 안정을 위해 수입을 많이 했다. 지난 배추 파동을 보고 올봄에는 배추를 너무 많이 심었다. 이 때문에 또 파동이 났다. 배추밭을 갈아엎고 난리가 났다. 이번 가을에도 배추 수확량이 넘쳐 똥값이 됐다. 농민은 자연재해로 손해 보고, 정부의 물가 안정 정책으로도 손해를 본다."

―특정 농산물의 품귀 현상이 있으면 그 이듬해는 모두 그 농사만 짓는다. 공급 물량이 넘쳐서 가격이 폭락하는 사태가 반복된다. 이는 농가의 책임도 있지 않나?

"농부들도 나름대로 예측하지만 수급이 잘 안 맞는다. 농림수산식품부도 그걸 못하고 있다. 과학적 데이터가 없으니. 정말 어려운 노릇이다."

―한 농민이 'FTA로 도시 사람들은 농축산물 가격이 떨어져 좋아하는데 촌에서 뼈 빠지게 농사짓는 사람을 생각해봐라'는 편지를 내게 보내왔다. 하지만 도시 서민들로서는 농산물이나 돼지고기 가격이 올라가면 가계에 부담이 갈 수밖에 없다. 농민들로서는 농산물을 값싸게 먹으려는 도시 서민들이 괘씸하겠지만, 이들도 힘든 삶을 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농민의 삶이 더 못하다는 것은 소득 통계로 증명된다. 다 다르겠지만, 평균적으로 농민은 어렵다. 그런데 왜 농사를 짓느냐고 물으면, 떠나고 싶어도 갈 데가 없어 농사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농사말고 달리 배운 게 없어서."

―작년 농가 연평균 소득은 3212만1000원, 도시 근로자 가구 평균 소득은 4809만2000원이었다. 주거비와 식비·교통비 등 도시에서 사는 비용을 감안하면 가처분 소득에서 별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직접 농작물을 키우니 농촌에서는 굶어 죽지는 않는다. 먹고사는 문제를 따지면 그렇다. 하지만 의료·문화·교육 시설이 부족하다. 만약 좋다면 왜 농촌을 떠나겠나. 우리 형제도 도시로 나갔다. 사람답게 사니까 도시로 나가는 것이다. 젊은 날 나도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집안을 누군가는 지켜야 했다. 농촌에는 점점 인구가 줄고 고령자들만 남아있다."

―최근 통계로는 귀농 인구가 조금씩 늘어나 농촌 인구 감소가 주춤해진 걸로 나왔다(농촌 인구는 약 875만명). 농촌의 삶에는 그래도 여유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농촌 사람이 도시 생활에 적응하기 어렵지만, 도시에 살다가 농사짓는 것은 더 어려울 것이다. 살기 편하고 문화를 향유할 수 있다면 왜 여자들이 농촌 총각에게 시집오지 않겠나. 농촌에는 열 집에서 네 집이 다문화 가정이다."

그도 농촌 노총각으로 있다가, 2006년 띠동갑인 중국 동포 아가씨와 결혼했다.

―당신은 농촌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고 보나?

"나는 농촌에 살면서 농사를 짓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세 끼 밥 안 굶고 아이들 대학에 보낼 수 있다면 괜찮다."

―농촌 안에서도 소득 양극화가 심한 것으로 조사됐다.

"고령층은 대부분 소농·가족농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개방이 되면서 농사도 '경영'이 됐고, 농민이 아니라 '농업경영인'으로 바뀌었다. 농촌 인구가 줄어드니 개인당 짓는 농사 규모도 커졌다. 규모가 커지면 이것저것 작물을 하는 복합영농을 할 수가 없다. 하나만 크게 짓는 전업농이 될 수밖에 없다. 나도 한때는 쌀, 배, 사과, 한우를 했지만, 이제 감 농사만 짓는다."

―형편이 어려운 농부도 많지만, 어떤 농촌에는 '억대 농부'도 많다고 들었다. 당신도 이 범주에 들어가나?

"지금은 농민운동을 하니까 내 농사에 전념할 수가 없다. 그런데 농사 규모를 키우면 키울수록 어려워졌다. 장비와 시설 투자가 늘어난다. 이는 대부분 부채로 해결한다. 그해 농사를 지어 부채를 갚는 식이다. 농산물 가격은 세월이 가도 그대로인데, 인건비와 농약값은 많이 올라갔다. 어떤 해에 큰 재해를 만나면 몽땅 빚더미에 앉게 되는 것이다. 작년 구제역 파동도 그런 경우다."

―당시 살처분한 소·돼지에 대해 시가의 80%쯤 보상을 해줬다. 일각에서는 "소 돼지를 수백 마리씩 키우면 농가라기보다 기업이다. 일반 기업에서는 이런 사고가 생겼다고 해서 국민 세금으로 보상해주진 않는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기업에도 공적자금이 투입되지 않는가. 당시 그 보상으로 축산업자가 돈 벌었다는 말도 나왔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그동안 그런 규모로 소·돼지를 키우고 축사 짓고 사료값을 대는 데 돈이 많이 들었다. 빚을 많이 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 살처분했다. 부채는 남고 축사도 그대로 남아있다. 그냥 놀릴 수가 없지 않은가. 그 보상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기껏 어린 소를 다시 구입하는 것이다."

현재 당정(黨政)은 한·미 FTA에 따른 농업 피해 대책으로 '13개항＋a'로 합의 중이다. 이 중에는 농산물 가격이 크게 하락할 경우 평균 가격의 90%까지 보상, 면세유 10년 연장, 금리 인하 등이 포함돼있다. 모두 22조원대 예산이다.

―농촌의 기반이 뿌리 뽑히는 것을 어떤 국민도 원치 않을 것이다.

"산업 분야에서 밸런스를 잘 맞춰주는 게 국가 경영이다. FTA로 반도체와 자동차 업계가 이익을 본다면, 대신 피해를 보는 농업에는 상응한 보상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우루과이라운드(UR)가 타결된 뒤 농촌 경쟁력을 위해 수십조원이 지원됐다. 당시 농촌에는 "개들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농민들은 그 돈으로 경로당을 짓고, 다방에 들락거리고, 개인적으로 사업을 벌이거나 주식 투자를 하다가 오히려 빚더미에 앉았다.

"그런 시행착오를 겪었으니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 돼서는 안된다. 농촌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행정은 행정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노력해야 한다. 농민 스스로도 잘 알 것이다."

―이런 피해 대책 합의가 이뤄져도, 서울 도심의 FTA 반대 시위는 총선·대선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나?

"아마 그럴 것 같다. 그런 시위를 벌이는 야당이나 사회단체에 대해 내가 뭐라고 말하기는 그렇다. 우리 농사가 바쁘다."

그는 지금껏 악수해본 숱한 손 중에 가장 두툼한 손바닥을 가진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