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84] 창경원 맹수 '줄초상' 원인 규명에 의학계 총출동

"창경원 동물원에 초상이 낫다. … 한 쌍 호랑이 가운데 암눔이 륙칠일전부터 우연히 긔운이 빠저 알코 잇더니, 이십칠일 오후 삼세의 앗가운 청춘을 일긔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마럿다. … 방금 초상을 치른 호랑이 울에는 홀애비된 숫 호랑이가 짤분 해와 긴 밤을 한숨으로 지내고 잇다."(1932년 12월 27일자)

1934년 들어 창경원의 묘과(猫科) 맹수가 잇따라 폐사했다. 이해에만 사자와 호랑이 네 마리가 죽었는데, 연말에 사자가 또 사경을 헤매는 일이 벌어졌다. 조선일보는 "… 창경원에는 지난봄 이래 사자와 범이 계속하야 괴상한 병으로 죽은 이후 음랭하고 쓸쓸한 긔분이 머물더니, 근일에 이르러 또 아푸리카 계의 암사자 다섯살 된 것이 무하지증(無何之症/이름도 몰라 고칠 수 없는 병)으로 위급한 처지에 잇고, 영국계의 '뽀니-' 왜마(倭馬)가 골연증(骨軟症)을 이르켜 역시 사경인데… 근년 봄 이래로 줄초상이 난 끝에 또 이와가튼 괴상한 병이 류행하야, 창경원 개설 이래 처음되는 큰 공황을 이르키고 잇다"며 '동물원의 대이변'을 전했다.(1934년 12월 21일자)

암사자는 그해를 넘기지 못했는데, 이듬해 벽두 또 비보가 날아왔다. 세 마리 가운데 홀로 남았던 수사자마저 '홀연히 세상을 떠나', 창경원에서 '맹수의 왕(獸王)' 사자가 전멸해 버린 것.(1935년 1월 15일자) '조선에 유일한' 창경원 동물원은 최대 위기를 맞았고, 관리 주체인 이왕직(李王職)은 단번에 수만원 손실을 입었다.

그런데 '조선 동물학계의 크나큰 연구 제목'이 된 맹수 사인(死因)을 놓고, 총독부 세균검사실은 '패혈증(세균)'으로, 경성제대 의학부는 '여과성병원체(瀘過性病源體·바이러스)'에 의한 것으로 서로 다르게 발표, '백수의 왕 창경원 사자'가 '과연 어느 병에 죽은 것이냐고' 죽어서까지 울부짓는(咆吼) '논란'이 벌어졌다.(1935년 1월 31일자)

경성제대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맹수를 잇따라 해부, 논란을 일으킨 사인 규명에 돌입했다. 경성제대 병리학실 이재곤(李在棍)은 이를 토대로 '의학계의 대파문, 맹수중 왕 사인 시비'를 추적했고(1935년 2월 2~8일자), 논쟁을 지켜보며 침묵하던 조선군 수의부(獸醫部)도 원인 규명에 가세했다.(1935년 2월 6일자)

경성제대가 내린 맹수 사인은 '치료방법은 아직까지 업다'는 무서운 마비저(馬鼻疽). "마비저에 걸려 있든 말을 잡아 먹인 것이 병의 원인"으로 추정됐다.(1935년 2월 8일자) 조선군 사령부도 '패혈증은 아니고 비저병(鼻疽病)과 관련된 것'이라고 밝혀, 경성제대의 손을 들어줬다.(1935년 2월 9일자) 이 사건은 수의학은 물론 병원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됐다.

맹수 몰사 사건 후 이왕직은 사자 세 마리, 호랑이 두 마리 외에 '북 아메리카 산악지대에 사는 극히 흉학한 동물로 일본 내지의 각 동물원에도 업는 진귀한 동물'인 퓨마 두 마리 등을 새로 들여와 '창경원 진용'을 새로 갖췄다.(1935년 2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