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간 전시회 1000번 연 화가 있을까요?"

"전시회라고 특별할 게 있나요? 영화 개봉날이 다 내 전시회날이었는데…. 서울 시민 1000만명이 보는 전시회였으니, 전시회도 그런 전시회가 없었죠."

40년 '극장 간판장이'가 자기 역사를 전시회에서 선보인다. 31일까지 서울 충무아트홀에서 열리는 수제(手製) 극장 간판 전시회 '사라진 화가들의 영화'에 참여하는 백춘태(68)씨. 그 밖에도 김형배(62)·김영준(54)·강천식(40)씨 등의 간판 화가가 옛 간판 복원작과 옛 간판 사진 등을 내놓았다. 미디어 아티스트 김현승(31)씨는 간판 화가 인터뷰와 영화 간판 제작 과정을 담은 영상을 선보인다. 전시작은 모두 20여점.

이 가운데 주인공 격인 백춘태씨는 열아홉 살 때부터 극장 간판을 그렸다. '장군의 아들'(1990) '경마장 가는 길'(1991) '서편제'(1993) 등 2000년대 초까지 1000여편이 그의 손을 통해 내걸렸다.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컴퓨터 실사(實寫) 간판 도입으로 붓을 놓기 전까지 서울의 간판 화가 가운데 '1인자'로 손꼽혔다.

황해도 수안 출신으로 일곱 살 때 월남해 인천서 자란 백씨는 어릴 때 사생대회 상을 휩쓸었다. 미대에도 합격했지만 가난 때문에 '화가' 꿈은 접었다. 그림 실컷 그리고, 그림 못잖게 좋아하는 영화도 마음껏 볼 수 있겠다 싶어 택한 직업이 '간판장이'. 첫 작품은 황해남·조미령이 나오는 '이름 없는 별들'이었다.

극장 간판의 생명은 배우 얼굴을 실제와 똑 닮게 그리는 것. 백씨는 "스틸컷을 참고해 그린다. 서양 배우들은 윤곽이 뚜렷해 쉬운데, 우리 배우들은 참 힘들다. 임예진씨가 특히 힘들었다. 세 배나 시간이 들었다"고 했다. '인상적 간판'을 그리려면 줄거리 파악은 필수. 그는 "내가 그린 영화는 거의 다 봤다. 직접 보지 못하면 대본이라도 봤다"고 했다.

영화배우의 '로비'를 받은 적도 있다. "1977년 '겨울여자' 개봉 직전에 한 신인이 매일 밤 찾아와 '내 얼굴을 크게 띄워달라'고 부탁했다. 신성일·장미희 같은 쟁쟁한 스타들이 나왔지만 정성이 갸륵해 가장 크게 그려줬다. 얼굴 아래엔 '한국이 낳은 최고의 성격파 스타 탄생'이라고 적었다. 그때 그 배우가 얼마 전 세상을 뜬 김추련이었다."

개봉과 함께 세상에 등장해 종영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간판 그림의 운명. 하얀 에나멜 도료로 몽땅 지우고 그 위에 다음 영화를 그린다. 백씨는 이번 전시를 위해 옛 작업을 다시 했다. "영원히 사라져버린 직업 아닙니까. 세상이 변하는 바람에 억지로 붓을 놓았는데, 그 상처가 참 큽디다. 하지만 배를 곯아도 꿈과 희망이 있던 옛날이 떠올라,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참 즐거웠습니다."(02)2230-6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