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냉담자(미사 참석을 중단한 신자) 김훈, 순교와 배교를 말하다

"저는 유아 세례를 받았습니다."

40년 냉담자(冷淡者·미사 참석과 성사 생활을 중단한 신자)는 자신의 삶과 신앙, 200년 전 사람들의 생사를 건 신념과 살아남음의 문제를 담담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숨김없는 '고해성사' 같은 장면이었다.

소설가 김훈(63)이 13일 저녁 서울 광장동성당에서 천주교 신자 300여명과 마주앉았다. 지난 10월 펴낸 장편 '흑산(黑山·사진)'(학고재)에 관해 대화하는 자리다. '흑산'은 조선 말 신유박해(1801년)를 배경으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천주교를 배교한 다산 정약용과 순교한 황사영 그리고 조용히 배교한 뒤 물고기만 들여다보고 살았던 정약전 등의 이야기다. 10만부 돌파를 앞둔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다.

김씨는 3대째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던 외가의 영향으로 유아 세례를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라틴어를 배워 미사에서 복사(服事)를 섰다. 하지만 군에 다녀오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신앙과 멀어졌다. 그는 강연 서두에서 "신부님이 나오라 해서 왔지만 성당에서 무슨 말을 하려니 더 큰 죄를 짓는가 싶어 두렵다"고 했다.

이날 강연에서 작가는 "'흑산'에서 신앙과 더불어 내세(來世)를 지향하는 사람보다는 신앙과 더불어 세속을 지향하고 신앙의 힘으로 세속의 문제를 해결하고 세속을 천당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으로 만들려고 애쓰다 박해받고 숨진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그리려 했다"고 했다.

소설 속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과 변론도 했다. 정약용 형제 중 순교한 정약종에 대해선 "순교 외양만 잠깐 썼다"며 "신앙의 내면을 묘사하는 것은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했다. 다산과 정약전에 대해선 "배교라기보다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백서사건의 주인공 황사영에 대해선 "고립무원 상태의 토굴에서 인간이 자기의 영성을 끝까지 지켜냈다는 것이 너무도 두렵고 놀라웠다"고 했다. 그렇지만 작가 김훈이 애착을 느낀 것은 마부 마노리가 아닐까. 서울에서 북경을 오가며 메신저 역할을 한 이 마부에 대해 김훈은 "인간이 인간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인간 존재의 고귀함을 깨닫고, 소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는 사람으로 그렸다"며 "그런 비천한 지위에 속하는 사람들이 원래 타고난 자기의 영성, 그것들의 힘과 아름다움, 그런 것을 묘사할 때 아주 많은 행복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서 교리를 배울 때 삼위일체, 창조론 등은 어려웠다"며 "그러나 아주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있었다"고 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죠. 거기에 추호의 의심도 할 수 없는 진리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죠. 차별하지 말고, 억압하지 말고, 빼앗지 말라, 이런 게 다 포함되는 것이죠.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그 한마디만 가지고도 우리는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김훈은 글에 '사랑'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그는 "젊었을 땐 뭐든 다 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이 먹을수록 내가 장악 못 할 말들은 쓸 수 없게 됐다. 사랑이란 말도 그 중 하나"라며 "그래도 몇 번은 꼭 쓰고 싶다. 누구나 다 수긍할 수 있는 자리에다 아주 정확하게 '사랑'을 써보는 것이 내 소원"이라고 했고 박수가 터져 나왔다.

'40년 냉담자'는 "'냉담자'는 심한 표현"이라며 "그냥 삶에 끄달리고 짓눌려 살다 보니 저절로 멀어진 것이 일상화 습관화됐고, 그 기간이 너무 길어지니까 나하고 완전히 끝났구나 생각했던 것이지 성당에 안 나간다고 매일매일 성당을 미워하거나 매일매일 큰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고 해 폭소를 자아냈다.

광장동성당 박근태(50) 주임신부는 "소설이 나온 뒤 평화신문 인터뷰를 보고 강연 부탁을 했더니 처음엔 몇 번이나 사양하셨다. '그냥 살아온 얘기, 소설 얘기만 해주시면 신앙과 사회생활 사이에서 고민하는 신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득해 겨우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