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내 인생]서점 등 하며 두 아이 키운 뒤 네일아트 봉사하는 조수자(68)씨

    입력 : 2011.12.14 23:37 | 수정 : 2011.12.15 11:42

    “어르신들께 훈장 달아주는 심정으로 손톱 단장해드려요”
    서른 셋에 남편 잃고 책방·미장원 등 하며 봉사활동
    은퇴 후 네일아트 배워 매주 봉사단 20명 이끌고 복지관·요양원 돌아다니며 노인들의 손톱 예쁘게 단장

    남편을 떠나 보내고 작은 책방을 하던 시절. 나는 아이들과 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이모부'가 아니고 뭐라고 했죠? 리무버(매니큐어 지울 때 쓰는 용액). 다 같이 따라 해보세요! 리무버!"

    "추우면 뭐 입어야 되죠? 코트 입어야 하죠? 그 위에 탑(소매 없는 웃옷)도 입어야 하죠? 둘이 합치면 뭐가 된다고요? '탑코트'죠? 잊지 마세요. 마지막에 바르는 매니큐어예요, 탑코트!"

    내가 다니는 경기도 의정부노인복지관에는 1년에 한 번 네일아트 강사들이 온다. 나처럼 네일아트로 자원봉사를 하는 노인들에게 새로운 기술을 교육하기 위해서다. 용어가 얼마나 어려운지 머리에 쥐가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한 자라도 놓칠까 봐 귀를 쫑긋 세운다.

    요즘 내 보물 1호는 각종 매니큐어와 리무버다. 마디마디 굵어진 노인들의 손끝을 반짝반짝 빛내는 일에서 나는 인생의 소소한 보람을 느낀다/허영한 기자 young@chosun.com
    참, 네일아트가 뭔가 하는 분도 계실 테니 간단히 설명부터 하겠다. 네일아트는 손톱을 다듬고 매니큐어를 칠해 알록달록 예쁘게 만드는 일이다. 나는 이 네일아트로 노인과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에게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우리 복지관 노인들이 만든 네일아트 봉사단인 '네일반짝 봉사단' 반장이다.

    '낼모레 일흔인 할머니가 웬 손톱 소제?'라고 하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르시는 말씀이다. 마디마디 굵은 주름이 깊이 팬 할머니·할아버지 손을 정성스레 주물러 드리면서 인생 얘기하고 말동무 되어 드리는 일이다. 매니큐어는 그저 곁들여지는 양념일 뿐 진짜 목적은 외로운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이 봉사를 한 지 어느덧 7년이 됐다.

    매니큐어와 나의 인연은 사실 30년이 넘었다. 젊은 시절 나는 미장원을 꽤 오래 했다. 미장원에서 빠지지 않는 게 손톱 손질 아닌가. 밥벌이를 위해 익혔던 기술이 늘그막 봉사의 밑천이 된 셈이다.

    미장원을 열기까지 꽤 많은 사연이 있었다. 나는 서른셋에 남편을 앞세웠다. 아이 둘을 남기고 남편이 간암으로 저세상으로 훌쩍 떠났다. 사업을 하던 남편이 남긴 유산은 빚더미였다. 빚을 청산하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은 달랑 70만원뿐이었다. 앞날이 막막했다. 아이들과 연탄가스를 마시고 세상과 이별해버릴까, 모진 생각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연을 딱하게 여겼던 이웃 하나가 제안을 했다. 서울 전농동에서 책방을 하던 이 이웃은 곧 아이를 낳아야 한다며 딱 1년 동안만 책방을 대신 운영해 달라고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중의 돈 70만원을 그 이웃에게 주고 지하 단칸방 하나가 딸린 책방을 떠맡았다. 이제야 길이 보이는가 했더니 하늘은 매정했다. 여름에 물난리가 나 오수(汚水)가 지하방을 덮쳤다. 아이 둘과 부둥켜 울며 물에 퉁퉁 불어 부푼 책을 말리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그렇게 계속 살 수는 없었다. 아이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선 기술이 필요했다. 주변에선 여자 손님을 상대하는 양장점이나 미장원을 권했다. 고심 끝에 1년 만에 책방을 접고 방세를 빼 미용학원에 등록하고 미장원을 차렸다.

    미장원을 차리면서 동시에 매주 목요일마다 성당에 가서 갈 곳 없는 노숙자와 장애인의 머리를 잘라줬다. 좋은 이웃 덕에 입에 풀칠하게 됐기에 어렵게 사는 이웃을 보고 눈감을 수가 없었다. 봉사란 게 중독성이 있어서 하면 할수록 또 다른 봉사를 찾게 됐다. 미용 봉사 외에도 독거노인을 위한 도시락 배달도 하게 됐다.

    미장원을 15년 했을 때쯤 몸이 고장 신호를 보내왔다. 배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쓸개에 담석이 생겼다고 했다. 그동안 바지런히 일한 덕에 세 식구 먹고살 밑천은 마련해 둔 상태라서 미련없이 미장원을 접었다. 그런데 일에도 관성(慣性)이 있는지, 막상 일을 안 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집 근처 의정부노인복지관에 갔더니 일과 함께 나를 지탱했던 봉사를 할 수 있는 길이 다양하게 있었다. 처음엔 호스피스 과정을 이수하고 간병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2005년 네일아트 과정이 생겨 교육을 받고 드디어 자원봉사를 하게 됐다.

    오랜만에 매니큐어를 다시 잡았지만 감은 여전했다. 남들은 삐뚤 빼뚤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나는 한 번에 깨끗하게 완성했다. 요즘 나는 스무명의 봉사단원과 함께 매주 매니큐어와 도구들을 가득 챙겨 복지관과 요양원을 돌아다닌다. 처음엔 "안 발라. 민망하게 무슨 매니큐어야?"라던 노인들이 이젠 서로 빨강, 핑크색으로 발라달라고 야단이다. 평생 제 손을 돌볼 틈 없이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희생했던 그들에게 자그만 훈장을 달아주는 심정으로 네일아트에 임한다. 매니큐어가 이제 도착 지점을 몇 걸음 안 남긴 그분의 인생을, 그리고 나의 인생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