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히어 앤 데어… '지옥'에 사랑이 있더라… 진한 곰국 같은

'세렌디피티'나 '해리가 샐리를 만날 때'와 같은 영화처럼 할리우드의 로맨스는 대부분 뉴욕에서 이뤄진다. 그러나 세르비아 출신 감독 다코 룬구로브가 연출한 '히어 앤 데어'의 미(美) 중년 로버트(데이비드 손튼)는 뉴욕을 떠난 뒤에야 사랑을 찾는다.

한때 뉴욕의 촉망 받던 색소폰 연주자였던 로버트는 월세 아파트에서조차 쫓겨난 실업자 신세다. 우연히 알게 된 건실한 세르비아 청년 브랑코가 그에게 돈벌이를 제안한다. 로버트가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 가서 브랑코의 애인과 위장결혼한 뒤 그녀를 뉴욕으로 데려오면 5000달러를 주겠다는 것. 베오그라드에 도착한 로버트는 낯선 도시의 묘한 리듬에 흥미를 느끼고, 그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브랑코의 엄마 올가(미르자나 카라노비크)와 예기치 못한 사랑에 빠진다.

히어 앤 데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공간'이다. 세르비아에서 이민 와 이삿짐을 나르며 생계를 이어나가는 청년 브랑코와 여자친구는 뉴욕을 '천국'처럼 여긴다. 그러나 브랑코는 뉴욕에서 유일한 생계수단인 밴을 도둑맞고, 친구라고 여겼던 이에게 사기까지 당한다. 로버트는 오히려 처음엔 '지옥'인 줄 알았던 베오그라드에서 맥주와 잠자리를 선뜻 내주는 친구를 사귀고, 사랑하는 여자까지 만난다. 룬구로브 감독은 1991년 세르비아(당시 유고슬라비아)에서 뉴욕으로 건너가 브랑코처럼 이삿짐 나르는 일을 하며 학교에 다녔다. 그에겐 뉴욕이나 베오그라드 모두 살풍경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도시다.

할리우드 로맨스 영화의 사랑이 '라면'이라면 로버트와 올가가 만드는 중년의 사랑은 '곰국'과도 같다. 3분 만에 조리가 되고, 인공첨가물로 자극적인 맛을 쉽게 낼 수 있는 라면에 비해 곰국은 재료의 영양과 맛이 뭉근하게 우러나올 때까지 오래도록 끓여 만든다. 곰국은 답답하긴 하지만 여운이 길다. 외로운 이들의 헛헛한 마음은 라면보단 곰국 같은 사랑이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상영 중. 15세 이상 관람가.

[이것이 포인트]

#장면
"음악을 들으면 식물이 더 잘 자란다"는 올가의 권유에 못 이겨 그가 키우는 식물 앞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는 로버트. 둔탁한 그의 색소폰 소리에 관객의 마음이 절로 설렌다.

#대사
"제 눈엔… 여전히 뮤지션으로 보여요"("음악가가 될 운명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좌절한 로버트에게 올가가 하는 말.)

#해외평
슬리보비츠(헝가리 및 발칸 제국의 플럼 브랜디)처럼, 이 영화는 당신에게 슬그머니 다가간다.(뉴욕 타임스)

#이런 분들 보세요
감정 과잉의, 달콤한 할리우드 로맨스에 냉소를 보내는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