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88] 어촌 마을 나진에 쏟아진 ‘황금 폭탄’

조선일보 1926년 5월 28일자 경제면 머리기사는 '청진항이 길회선(吉會線)의 종단항(終端港·종점 항구)으로 결정'됐다는 내용이었다. 중국 길림과 함경북도 회령을 잇는 길회선은 1909년 체결된 간도협약에 포함된 사안으로, 그 종단항은 중국 만주와 일본 내지를 직접 연결하는 동북아의 전략적 요충지로 뜨거운 관심사였다.

당시 청진이나 1921년 개항한 웅기(雄基)가 종단항이 될 것으로 보는 게 '상식'이었다. '세론이 효효한 길회선 종단항 / 결국은 청진항?'(1926년 6월 20일자) '길회선 종단 후보지는 웅기 청진'(1926년 12월 24일자) '길회선 종단항 웅기와 청진, 2항 병진주의 설'(1927년 2월 18일자) 같은 기사가 길회선 착공도 전에 수시로 등장했다.

길회선 부설은 더뎠다. '일본은 맛치 한칼로 깁히 우리의 가슴을 찌르랴고 하는 것'으로 보고(1931년 4월 24일자) 중국 내부에서 줄기차게 반대 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1928년 10월 20·27일자 등)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제가 만주 일대를 장악한 뒤엔 사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길림성(省) 측은 '길회선 부설 맹렬운동'에 나섰고(1931년 10월 22일자 호외), 철도 부설이 구체화되자 용정(龍井) 주민은 '40만의 사활이 걸렸다'며 길회선 통과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1932년 2월 2일자 등)

사정이 바뀐 것은 종단항도 마찬가지였다. 다수가 예상한 청진·웅기가 아니라, 주민 100여 가구가 사는 작은 어촌 나진으로 최종 결정된 것. 이후 "일어촌(一漁村)에 불과한 나진은 일약 전 조선, 아니 전 세계에 알려진 유명한 곳"이 되었고, 전국에서 '뿌로- 커'가 몰려 땅 투기 열풍이 불면서 땅값이 '평당 1,2전 2,30전 하든 것이 일약 2십원내지 4십여원으로 대폭등' '토지매매하는 뒤에 서 있기만해도 한 백원쯤은 쉽게 쥐고' '의복을 허술하게 입은 사람들 회중(懷中)에서도 지폐 뭉턱이가 쑥쑥 나오고' '국수 한그릇 갑을 치루는 데도 백원자리를 쑥쑥 내놓을' 정도로 돈이 흘러 넘쳤다.(1933년 2월 3일자)

갑자기 쏟아진 '황금 폭탄'에 '평풍에 그린 룡을 잡어타고 구룸 우로 달리는 격'이 된 나진 주민들을 본 홍종인(洪鐘仁) 기자는, '그들의 손에 쥐인 지폐뭉치가 어린애의 손에 잡힌 칼자루' 같다며 걱정했다.(1933년 7월 28일자)

나진의 땅값 폭등은 다른 모든 투기와 마찬가지로 얼마 안 가 '남가일몽의 토지졸부열'로 끝나고 말았다. 총독부가 '최고 5원 최하 1원20전'으로 토지 수용 가격을 결정하면서, 지주들이 '대공황'에 빠진 것.(1933년 8월 26일자)

불과 몇 달 사이에 땅값이 수백배까지 뛴 '나진의 추억'은 우리나라 부동산 투기의 맹아였다. 이후 '도시계획 앞두고 함흥지가(地價) 대폭등'(1936년 1월 12일자), 청진에 제철소가 들어선다는 '설'에 '토지광(土地狂)시대가 도래'(1936년 11월 12일자) 하는 등 부동산 투기와 이에 대한 대책이 지면에 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