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하정웅(72) 박사는 지난 1993년 이후 광주광역시립미술관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국내 미술관 여러 곳에 7천여 점의 소장품을 기증해온 재일교포 사업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이다.
내년 4월 전남 영암군에는 하정웅 박사의 성을 넣어 명명한 미술관인 ‘영암 군립 河 미술관’이 정식 개관한다. 그가 기증한 2천 5백여 점의 미술 작품이 개관의 모태가 됐다. 포항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광주조선대미술관, 전라북도도립미술관, 대전 시립미술관 등지에 하 박사의 소장품이 전시돼 있다.
하 박사의 컬렉션은 남다른 출발점을 보인다. 재일 한국인 2세로서의 숙명, 한일의 역사적 배경과 처지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다른 미술 컬렉션과는 근본적으로 성격과 질,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하 박사는 “글은 사람이라는 격언을 예술도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하정웅 컬렉션은 평화와 사랑, 상호이해를 실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새로운 예술의 표현이다”라고 말했다.
하 박사가 그림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도쿄올림픽이 열리기 한 해전인 1963년 일본에서 컬러 TV가 생산되면서부터다. 그는 전기제품 대리점을 차리면서 많은 돈을 벌었고, 가난한 동포 화가들의 그림을 사들였다.
하 박사는 재일교포 권익문제와 관련한 일을 하면서 민족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됐다고 고백한다. “한국의 일본 식민지 시절 부모님을 따라 공사 현장에 갔다가 강제 징용된 조선인을 보기도 했었다. 그것은 내 삶의 역사며 잊어버릴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일들이다. 재일교포 2세로서, 또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모으는 작품들은 그것들에 대한 이야기 자체이다” 덧붙여 하 박사는 “굴곡진 역사를 견뎌온 동시대 화가들이 처절한 몸부림으로 그린 작품을 모아 조국에 기증하는 것으로 화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한을 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재일교포 작가들의 작품, 인권과 관련해 주제가 있는 작품들을 주로 찾고 수집했다. 자신이 살아왔던 시기를 같이 공유한 작가들의 작품은 역사의 증언이다.
한편, 국립 고궁박물관에서는 하 박사의 자료 기증으로 <순종 황제의 서북 순행과 영친왕ㆍ왕비의 일생 특별전>을 지난 22일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실에서 개최하고 있다.
지난 1974년 봄 창덕궁 낙선재에서 미술품 바자를 준비하던 영친왕비와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영친왕비 사후 그가 남긴 유품을 인수했다. 인수 후 그는 국가에서 연구ㆍ보존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 결론 내려 고궁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번 특별전에는 순종황제의 서북 순행사진첩과 영친왕 휴대용 수첩, 영친왕비 일기 등이 처음으로 전시되고 영친왕ㆍ왕비의 개인적인 소견과 가족과 지인에 대한 애틋함을 느낄 수 있는 자료도 함께 공개된다.
마지막으로 하 박사는 조선총독부의 임업 기술자로 일본인이었지만 조선을 사랑하고 일했던 아사카와 타쿠미(1891~1931) 선생의 업적으로 다뤄진 내년 봄에 개봉될 <길, 백자의 사람>이 보다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홍보되어 그가 남긴 유업을 받들어 한국인의 가슴속에 깊숙이 울려 퍼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미술로 쓰는 재일의 역사
송영옥(1917~1999)의 작품 ‘삼면경’은 남북 대립 상황과 재일 한국인으로서 받는 차별과 멸시 등을 사실적 화법으로 표현하고 있고, 1948년 제주도 4ㆍ3 사건에 가담한 죄로 경찰에 쫓겨 일본으로 밀항, 막노동자로 생활하며 작품 활동을 한 조양규(1927~?)는 1950년대 일본 사실주의의 대표 작가였다. 조양규의 ‘31번 창고’, ‘창고지기’, ‘목이 잘린 닭’ 등은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