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내 인생] 기업 CEO에서 북카페 주인 된 김종헌(64)씨

젊은 시절 서울 인사동 서실(書室)에서 서예를 배웠습니다. 서예 선생님 친구 중에 역학(易學)의 대가가 계셨습니다. 대기업 회장이 신입 사원 뽑을 때 면접장에 배석했다던 분입니다. 어느 날 그분이 저를 찬찬히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시데요. "김군, 자네는 돈을 무진장 벌 걸세. 근데 자네 돈이 아니라 남의 돈일세."

지금 그 말씀을 떠올리면 참 신통하다 싶습니다. 한국 주력 상품이 섬유이던 시절, 군 복무를 마치고 '남영나이론(현재 비비안)'에 입사했습니다. 유럽으로, 미국으로, 아프리카와 중동으로 판로를 뚫기 위해 안 가본 곳 없이 다녔습니다. 나라 경제가 쑥쑥 크던 시절이라 올해 50원어치 팔면 내년엔 75원어치 팔고 그다음 해엔 150원어치 팔았습니다. 신났지요.

하지만 저는 쉰여섯 살 되던 2003년, 부회장을 끝으로 청춘을 바친 회사와 '굿바이'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 뭘 믿고?" 창업주 회장님을 모시며 부회장까지 지냈으니 월급쟁이로선 원도 한도 없이 끝까지 가본 셈입니다. 더 다닐 수 있었지만, 저는 '지금이 적기(適期)'라고 느꼈습니다. 오랫동안 회사 생활을 하면서, 섭섭한 마음으로 회사를 떠나는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평생을 바친 직장인데…. 최고의 연주를 한 뒤 깨끗하게 활을 내려놓는 음악가처럼 멋지게 회사와 작별하고 저는 또 그다음의 인생을 찾아 뚜벅뚜벅 걸어가고 싶었습니다.

강원도에 뿌리내리고 '피스오브마인드(Peace of Mind)'라는 북카페를 운영한 지 올해로 9년째입니다. 처음엔 홍천에 냈다가 춘천으로 옮겼습니다. 아내(59)는 빵을 굽고, 저는 차를 끓입니다. 한가롭지만 외롭지 않아요. 공자님도 "먼 데서 친구가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하셨잖아요. 평생 모은 소장품 2만점을 보기 위해 제게도 수많은 사람이 찾아옵니다. 뭘 모았냐고요? 고서(古書)와 붓글씨, 오래 묵은 유성기 음반, 그리고 팸플릿·대본·포스터 등 1950년대 이후 한국 연극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각종 자료입니다. 제가 손수 발품을 팔며 사서 모은 것도 있고, 지인들이 "평생 모았는데, 자손들은 뜻이 없다. 흩어지지 않게 간직해달라"고 맡긴 것도 있습니다.

저는 원래 서울 토박이입니다.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종로에서 커다란 약재상을 하시다 광복 전후에 미곡상을 차렸습니다. 강원도에서 나는 온갖 잡곡이 우리 가게에 모여 전국으로 풀려나갔습니다. 서울 사람 세 명 중 한 명은 우리 집을 거쳐간 콩으로 두부를 만들어 먹는다고 했지요. 할아버지·할머니, 부모님, 우리 5남매에다 6·25전쟁 통에 아버지를 잃은 친척 아이들과 일하는 사람들까지 30명쯤 되는 대식구가 북적거렸습니다. 활기차고 풍요로운 유년이었죠.

그런데 4·19혁명을 기점으로 집안이 기울더군요. 우리 가게에서 일본에 팥을 수출했는데, 혁명 와중에 한 해 장사를 못 해 도산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재창업했지만 가세(家勢)는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저는 중학교 때부터 틈만 나면 청계천 일대 책방을 돌며 옛날 책을 사 모았습니다. 대학 때는 불교 공부에 심취했고요.

저는 회사 다닐 때 한 번도 '여기까지는 내 일이고, 여기부터는 회사 일이다'는 식으로 쩨쩨하게 몸을 사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회사 일에 온몸을 바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선 '다음 인생'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30대 후반 독일 지사에서 근무할 때, 유럽 곳곳을 출장다니면서 짬 날 때마다 책방에 들러 책을 사 모았습니다. 책과 차가 있는 '북카페'를 처음 접하고는 '이거다!' 싶었습니다. 아내도 내 생각이 마음에 들었는지 독일의 제과 명장(名匠) 밑에서 3년간 도제식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 뒤 서울에 돌아와 국내 영업을 맡았는데, 어느 날 광주광역시 출장길에 골동품 가게에 들렀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대학 시절 누군가에게 써 준 붓글씨가 그 집에 걸려 있더라고요. "공부할 때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기세로, 불길이 타오르는 기세로 맹렬하게 공부하라"는 불경(佛經) 구절이었습니다. 가게 주인에게 "얼마냐"고 물어 두말 안 하고 사 왔습니다. 그 글씨가 지금은 제 북카페에 걸려있답니다.

고소한 빵 냄새, 웅숭깊은 차 향기, 나직하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 수십년 수백년의 세월을 견딘 옛 책, 힘차고 단정한 붓글씨, 먼 데서 찾아오는 좋은 사람들…. 저의 둘째 인생은 멋진 선택이었다고 자부합니다. 제가 직장을 떠날 때 의아해하던 친구들도 이젠 거의 은퇴했는데, 돈·명성·권력처럼 '자기 바깥의 어떤 것'을 추구해온 이들은 헛헛해 보이더군요. 얼굴이 맑고 밝은 친구들은 따로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찾아 그 일에 몰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