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손들, 달러에 돈을 묻기 시작했다

지난주 우리투자증권 프리미어블루(VVIP급) 강북센터는 독일 최대 은행인 도이체방크 달러 표시 채권을 800만달러어치(약 92억원) 팔았다. 투자자 한 명이 100만달러어치를 매입한 사례도 있었다. 허윤석 우리투자증권 부장은 "부도 위험이 작은 우량 은행에 높은 금리를 받고 투자할 수 있고, 달러 강세에 따라 환차익도 노릴 수 있어 투자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한은행 압구정PB센터는 최근 해외 교포들의 국내 원화 정기예금 12억원어치를 달러 예금으로 바꿨다. 달러가 내년 상반기까지 강세를 유지할 것이란 전망에 따른 것이었다. 이 센터 조성만 팀장은 "해외 펀드에 1억원 정도씩 투자한 고객들이 마이너스 수익을 낸 펀드를 환매한 뒤 원화로 환전하지 않고 계속 달러를 들고 있다. 내년에 달러값이 더 오르면 원화로 환전해 국내 주식형펀드에 재투자하겠다는 생각"이라고 전했다.

유럽 재정 위기와 글로벌 경기 불안 탓에 안전 자산으로서 달러 가치가 부각되면서, 국내 큰손 투자자들이 달러 투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미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은 20~21일 양일간 26원 이상 급락하며 일시적으로 '달러 약세' 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김정일 사망 사건 후 이상 급등했던 환율이 제자리를 찾아간 것이란 점에서 '글로벌 달러 강세'에 역행하는 흐름으로 보기는 어렵다.

◇유럽 재정 위기로 '귀하신 몸'

유로화 대비 미 달러화 가치는 유럽 재정 위기가 다시 심각해진 10월 이후 줄곧 오름세를 보였다. 지난 15일엔 1유로당 1.29달러로 1.30달러 선을 하향 돌파했다. 1.30달러 선이 무너진 것은 1월 이후 처음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유럽 재정 위기가 장기화될 것으로 보고 투자자들이 유로화를 투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난 9일 EU 정상들은 회원국의 재정 규율을 강화하는 신(新)재정협약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냈지만 영국이 협약에서 빠졌고, 유럽중앙은행(ECB)의 지원안도 내놓지 못했다. 이후 각자 살길 찾기에 나선 유럽계 은행들이 앞다퉈 달러 확보에 나서면서 달러 가치를 밀어올리고 있다.

국제 투자자들 사이에 유럽 국가들 국채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감이 고조되면서 미 국채 수요가 나날이 늘고 있는 점도 달러 강세를 뒷받침하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 8월 미국 신용등급이 강등됐음에도 지난 4개월간 미 국채값은 오히려 꾸준히 올랐다(금리 하락). 11월 미 국채(10년물) 평균 금리는 연 1.9%로 1950년 이후 처음으로 2.0%를 밑돌았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미국은 여전히 기축통화국이고 달러를 무한정 발행해 부채를 상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미 국채는 위험 제로(0)의 자산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3차 양적완화(중앙은행이 채권을 사들여 자금을 시중에 푸는 조치)를 계속 유보하고 있는 것도 달러 강세를 뒷받침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달러 강세, 내년 상반기까지"

여러 전문가들은 달러 강세현상이 적어도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큰 요인은 유럽발 재정 위기의 지속이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등 유럽 재정 위기 3국은 내년 1분기에만 2000억유로어치의 채권 만기가 도래한다. 채권을 상환하려면 국제 금융시장에서 새 돈을 끌어모아야 하고, 달러 수요는 늘어난다. 내년 6월까지 자본을 대폭 확충해야 할 유럽계 은행들의 자금 수요도 달러 가치를 끌어올릴 동력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또 초강도 긴축정책에 따른 유럽의 수요 감소가 신흥국의 수출 감소로 이어지고, 글로벌 경기 침체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면 '안전 자산'인 달러가 주목을 받게 될 공산이 크다.

결국 달러 강세현상은 내년 하반기 이후 세계 경제가 바닥을 찍고 상승세로 돌아설 때부터 다소 완화될 가능성이 크다. 임노중 솔로몬투자증권 연구원은 "미국 경제가 좋아서라기보다 유럽이 상대적으로 더 나빴기 때문에 달러가 강세를 보였는데, 세계 경제가 좋아지면 미국의 안 좋은 점이 부각돼 달러는 약세로 돌아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