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아티스들과의 만남] 재즈의 거장 레이 찰스, 만나보니…

1988년 5월부터 1992년 10월까지 4년 6개월간 KBS 연예가중계를 진행했다. 88서울올림픽이 코앞이었다. 이를 계기로 해외 아티스트가 많이 내한하기 시작했다. 연예가중계에서는 당연히 이들을 인터뷰해야 했다. 그때만 해도 영어를 할 수 있는 MC가 드물었다. 그나마 내가 괜찮다고 생각됐는지 방송사에서 MC를 맡겼다.

많은 사람을 만났다. 배우 브룩 쉴즈와 조디 포스터,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와 글로리아 에스테판, 그룹 올 포 원과 보이즈투맨,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 등을 인터뷰했다.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도 만났다. 내가 본 여성 중 지금까지도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다. 원곡 '하얀 손수건'을 부른 나나 무스쿠리도, 내가 부른 '투데이(today)'가 자기가 부른 것보다 낫다며 칭찬해준 존 덴버도 그때 만났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레이 찰스와 비비 킹이다. 1990년엔 담배회사 필립 모리스가 주최하는 재즈 순회공연이 한국에서도 열리게 됐다. 주최 측에서 누구를 초청할지 내게 조언을 구했다. 나는 레이 찰스와 비비 킹을 함께 무대에 세우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한 무대에 선 적이 없었다. 스타일도 달랐다. 비비 킹이 흑인 마을의 포근한 아저씨 같다면, 레이 찰스는 백인 같은 흑인이었다.

다행히 둘 다 무대에 서기로 계약이 성사됐다. 나를 비롯해 연예가중계 팀은 두 거장을 미리 인터뷰하려고 '재즈의 명소를 찾아서'란 기획으로 뉴욕을 찾았다.

비비 킹은 정말 소탈했다. 그 정도로 유명하면 근사한 식당에 갈 줄 알았다. 대신 우리는 계단에 앉아 햄버거를 먹었다. 인터뷰도 수월했다.

레이 찰스는 달랐다. 날카롭고 예술가 특유의 신경질적인 측면이 강했다. 인터뷰를 시작할 무렵에도 그는 딱딱했다. 감기에 걸렸다며 말을 아꼈고, 한국에서 할 콘서트도 달갑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래도 분위기를 풀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말했다. "당신 노래를 무척 좋아해요. 특히 '크라잉 타임(crying time)'을 즐겨 듣고 불렀습니다."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크라잉 타임은 그의 히트곡 중 아주 대중적인 노래는 아니었다. 그가 피아노를 치며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화음을 넣었다. 노래를 끝낸 다음부턴 확 달라졌다. "당신 화음이 감동적"이라며 언제부터 이 노래를 좋아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등을 묻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좋아져 인터뷰도 기분 좋게 진행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날엔 둘이 협연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평생 처음 만난다는 두 사람의 호흡이 그리 잘 맞을 수 없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뉴저지에 있는 누이동생 집에 가려고 호텔에서 차를 불렀다. 차 안에 레이 찰스 테이프가 잔뜩 있었다. 혹시나 해서 흑인 기사에게 레이 찰스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당연하죠. 당신도 좋아하세요?" "그럼요. 엊그제 레이 찰스를 만나기도 했어요."

설마 하는 표정으로 그가 다시 물었다. "진짜요?" "네. 레이가 감기 걸렸더라고요." "맞아요. 얼마 전 방송에서 그 얘기 들었어요."

그제야 믿는 눈치였다. 내게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다. "한국에서 TV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MC입니다. 레이 인터뷰하러 왔어요. 며칠 전엔 비비 킹도 만났어요."

그는 거의 까무러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차 안에서 레이 찰스와 비비 킹 이야기를 내내 나눴다. 내릴 때 120달러가 나왔으나 그는 반값으로 깎아줬다.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가수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