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사 종자돈 1500억… 세계 1위社 자산의 440분의 1

올 초부터 도입이 논의된 한국형 헤지펀드가 지난 23일 마침내 닻을 올렸다. 하지만 한국형 헤지펀드 1호에 대한 투자자들의 반응은 썰렁했다. 신한BNP파리바·한국투신·미래에셋 등 9개 자산 운용사가 총 1500억원의 자금을 모았는데 당초 목표치 5000억원의 3분의 1에 그쳤다. 9개사를 다 합쳐도 세계 1위 헤지펀드 운용사 브리지워터의 총자산(580억달러·66조원·2010년 말 기준)의 44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나마 끌어모은 자금도 투자자 돈이 아니라 자기 주머니나 계열사에서 나왔다. 헤지펀드의 안착을 원하는 프라임브로커(주식 대차 등 헤지펀드 관련 서비스를 해주는 증권사) 자금도 일부 지원됐다. 국내 기관투자가나 고액 자산가 등 순수 외부 자금은 한푼도 없었다. 헤지펀드가 과연 국내에서 성공할지에 대한 우려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다. 올해 국내에 처음 도입된 헤지펀드는 '한국형'이라고 불릴 만큼 미국·유럽에서 발달한 헤지펀드와 다른 점이 많고 그만큼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①트랙 레코드가 없다

헤지펀드의 출범 초기 가장 큰 한계는 '트랙 레코드'(track record·과거 실적)가 없다는 것이다. 해외 기관투자가들의 60%는 3년 이상 운용 실적이 검증되지 않으면 헤지펀드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조사가 있을 정도로 운용 실적은 투자금을 유치하는 데 결정적 요소다. 국내 헤지펀드를 운용하는 인력에 대한 신뢰가 낮다는 점도 기관투자가들이 선뜻 투자하지 않는 이유다. 대부분 운용사들이 기존에 고용돼 있던 펀드매니저들을 헤지펀드 매니저로 배치한 상황이다. 이준용 미래에셋맵스 금융공학부문 대표는 "출범 초기에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며 "최소 6개월이 지나면 운용 실적을 보고 헤지펀드에 관심을 갖게 되고, 1년은 지나야 돈을 맡기게 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②기존 사모펀드와 다를 게 없다?

업계에서는 기존 사모펀드 중에 헤지전략을 쓰는 펀드가 출시돼 있어 '한국형 헤지펀드'가 과연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를 우려한다. 이 사모펀드들 역시 헤지펀드 대표 전략인 롱숏 전략을 구사하고 있어 레버리지(돈을 빌려 투자하는 것)를 일으키지 못한다는 점 말고는 한국형 헤지펀드와 별 차이점이 없다. 업계에선 주식형 롱숏 헤지펀드의 경우 굳이 위험하게 레버리지를 일으킬 필요성도 크지 않다고 본다. 이 때문에 투자자들이 운용·성과 보수가 30~40% 더 비싼 헤지펀드에 굳이 투자할 매력을 못 느낄 수도 있다. 김의년 한국투신운용 팀장은 "한국형 헤지펀드가 성장하려면 기존의 사모펀드를 어떻게 규제할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③최소 금액 5억원 이상 등 각종 규제

업계에선 "해외 헤지펀드는 규제가 거의 없는데, 한국형 헤지펀드는 규제가 너무 많다"는 푸념이 나온다. 특히 개인 투자자들의 최소 가입금액을 5억원으로 제한함으로써 투자 장벽이 너무 높다는 지적이 있다. 또 헤지펀드 매니저는 다른 일반 펀드 운용에 절대 관여할 수 없어 운용사들은 인건비 부담이 크게 높아졌다고 우려한다. 레버리지 비율도 400% 이하로 제한돼 있다. 미국과 유럽에선 헤지펀드에 대한 규제가 거의 없다. 말 그대로 '시장에서 가능한 모든 전략'을 쓸 수 있는 것이 헤지펀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도입 초기에는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한 자산 운용사 펀드매니저는 "헤지펀드가 질서 있게 정착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고, 시장이 안정되면 규제도 차츰 풀릴 것"이라고 말했다.

④롱숏 전략밖에 없다

23일 출시된 헤지펀드 12개 중 11개는 롱숏 전략을 구사하는 펀드다. 롱숏 전략은 저평가된 주식은 사고, 고평가된 주식은 공매도(없는 주식을 빌려서 파는 것)해 수익을 노린다. 문제는 수백 가지에 달하는 헤지펀드 전략 중 국내에서 시도해볼 만한 전략이 아직 롱숏밖에 없다는 것이다. 각종 상품의 방향성에 베팅하는 '매크로전략'이나 선물·옵션 등을 시스템을 통해 거래하는 'CTA전략', 기업 인수·합병(M&A) 등 각종 사건을 활용해 수익을 내는 '이벤트 드리븐' 등은 아직 시도하기 어렵다는 분위기다. 한 자산 운용사 헤지펀드 매니저는 "아직 조지 소로스 같은 명성 있는 매니저가 없어 매크로 전략이 먹히기 쉽지 않고, 매매가 빈번한 CTA전략은 국내 선물·옵션시장의 유동성이 부족해 어렵다"며 "이벤트 드리븐 역시 국내 M&A시장 규모가 작아 활성화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⑤불확실한 세계 경제

유로존 위기 등 세계 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워진 요즘 헤지펀드 역시 고전할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시장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절대 수익을 추구하는 것이 헤지펀드이지만, 하락장에서 수익을 낼 수 있는 전략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전 세계 헤지펀드들의 평균 수익률은 마이너스 23%였다. 특히 국내 증시가 업종이나 기업 가치가 아니라 매일매일의 글로벌 뉴스에 따른 외국인 자금 유·출입에 의해 움직이고 있어 롱숏전략이 과연 성과를 낼 수 있을지도 우려가 크다. 2008년 롱숏전략의 평균 수익률은 마이너스 19%였다.

그러나 일각에선 시장이 어렵고 투자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은 요즘이야말로 헤지펀드에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김재칠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원은 "시장이 지금처럼 침체돼 있고, 변동성이 높을 때는 헤지펀드가 상대적으로 좋을 수 있다"며 "헤지펀드가 이런 시장에서 대안으로 떠오르면 3년 후엔 7조~13조원, 10년 후엔 23조~37조원대 시장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헤지펀드(hedge fund)

돈이 되는 곳에는 어디든 투자해 어떤 상황에서든 플러스 수익을 추구하는 펀드. 보통 매우 리스크가 큰 펀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이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위험을 회피(hedge)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1949년 포춘지 기자 출신인 미국 앨프리드 존스가 처음으로 도입해 고수익을 낸 것이 출발이 됐다. 이후 수백 가지가 넘는 전략들이 개발됐고,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1만개, 2조달러 규모로 커졌다. 현재 헤지펀드 거물로는 조지 소로스와 존 폴슨이 꼽힌다.

☞ 한국형 헤지펀드

국내에는 헤지펀드와 관련된 제도와 경험이 부족해 헤지펀드를 운용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금융당국이 국내 금융업계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올해 헤지펀드에 필요한 레버리지(돈을 빌려 투자하는 것)를 일정 한도 허용하는 등 관련 규정을 새로 만들었다. 미국에선 헤지펀드에 대한 규제가 거의 없는 것과 달리, 국내에선 각종 규제로 헤지펀드 전략이 제한적으로 허용된다는 점에서 ‘한국형 헤지펀드’라는 말이 나왔다.

☞ 롱숏 전략(long short)

가격 상승이 예상되는 주식이나 채권은 사고, 하락이 예상되면 공매도(없는 주식을 빌려서 파는 것)하는 헤지펀드의 대표 전략. 가격 예측을 잘 하면 하락장에서도 고수익을 내거나 손실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