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바다 표류기… 낯선 언어로 존재 더듬기

'2012 동인문학상' 첫 독회 통과의 주인공은 정영문의 장편 '어떤 작위의 세계'(문학과지성사)와 한강의 장편 '희랍어 시간'(문학동네)이 차지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유종호·김주영·김화영·오정희·이문열·정과리·신경숙)는 최근 '2012 동인문학상' 1차 심사독회를 갖고 이 두 작품을 내년도 동인문학상 최종심 후보작으로 올렸다. 동인상 심사독회는 전년도 8월부터 해당연도 7월까지 출간된 소설집과 장편을 대상으로 매달 열린다. 심사위원회는 월간 독회를 통과한 후보작 중에서 최종심사 진출작을 고른 뒤 내년 10월 초 수상작 결정 독회에서 2012년도 동인문학상의 주인공을 선정한다.

정영문(46)의 '어떤 작위의 세계'는 이 희귀한 개성을 지닌 작가의 몽상적 관념 혹은 뜬구름 같은 이야기. 공간으로 표현하면 샌프란시스코 체류기, 아니 표류기에 가깝다. 그의 문체를 빌리면 작가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보이는 대로 보고 듣고 느끼고 어쩔 수 없이 경험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아니,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들리는 대로 듣지 않고 느끼는 대로 느끼지 않고 경험한 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도"라는 게 작가의 독백.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1996년 장편 '겨우 존재하는 인간'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정영문은 "예술의 무의미로 세계의 무의미에 대적하는 작가"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번 작품은 "그 무의미의 세계가 한 단계 더 새로워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심사위원들은 "무의미가 몽상을 빚어냈는지, 아니면 몽상이 권태와 무의미를 빚어냈는지 그 순서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이 한몸으로 엮이면서 깊은 서정성과 감정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느껴졌다" "이전에는 무기력한 인간만을 그렸는데, 이번에는 신생(新生)을 향해 꿈틀거리고 있다.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더 주인공 의식이 형체를 갖춰서 '아무리 형편없어도 이것이 인생'이라는 생각까지 도달하고 있다"는 호의적 지지를 받았다.

한강(41)의 '희랍어 시간'은 시간이 갈수록 빛과 소리를 잃어가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 하지만 사랑 이야기라고 요약하기에는 단지 하나의 기척과 기척이 만날 뿐이다. 기승전결은커녕 몇 줄로 압축할 수 있는 줄거리도 그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말을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희랍어 강사)를 중심으로 작가는 말과 사물 사이의 긴장, 인간이 상실한 본질과 그에 대한 복원을 나직하게 이야기한다.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1993년 단편 '서울의 겨울'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작가의 다섯 번째 장편. 심사위원들은 이번 작품이 "최근 한강이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정신적 근원에 대한 질문이며, 이번 작품은 희랍어를 매개로 고(古)지도를 더듬어 가는 길"이라면서 "그 길은 몸속에 새겨져 있으며, 실명이나 청력을 잃거나 언어를 상실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언어와 시력은 곧 말과 사물 사이의 관계인데, 이 고통스럽고 진지한 탐구를 상황에 맞게 때로는 더듬거리는 언어로 표현하는 방식에 호감" "어떤 지문보다 행간으로 이야기를 하는 작품" "시종 근원과 존재의 문제를 파고들기 때문에 읽기 힘들지만 그만큼 진지한 작업" "지금까지 한강이 쓴 작품 중에 가장 호감이 간다"등으로 호평했다.

심사위원회는 또 구효서의 장편 '동주'(자음과모음)와 강영숙의 소설집 '아령하는 밤'(창작과비평)을 올 1월에 열리는 2차 독회에서 검토하기로 했다. 또 김성중 정용준 김선재 조현 등 신인작가들이 펴낸 첫 소설집에 대해서도 "언어를 부리는 솜씨나 아이디어의 신선함에서 한국문학에 대한 장래를 밝혀 줄 인상적인 작품"이라는 데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