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는 안보이고… 배우·개그맨·판사가 담론 쏟아내

가수가 노래만 하던 시대는 갔다. 판사가 판결로만 말하는 시대도 갔다. 누구든 거침없이 말하고 전파되고 이슈 중심에 오르내린 2011년. 지식사회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혹은 교수로 대표되는 전통적 '식자(識者)'나 '지성'은 더 이상 담론 생산의 주역이 아님을 증명한 한 해였다. 정보에 유희를 더한 '인포테이너(information+entertainer)시대'의 개막. 상반기 '복지'부터 하반기 '한·미 FTA'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주요 논쟁도 학계보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공간에서 더 빨랐고 더 뜨거웠다. 그 속에서 저들만의'이기적 진실'들이 '공감의 미로'를 찾아 맹렬히 분투했다.

◇지식, 상아탑에서 탈옥하다: 강연, 지식 콘서트

대중이 지식과 정보, 통찰을 얻은 곳은 토크 콘서트 형식의 대중강연, 뒤이은 강연자들의 말·글이었다. 전국에서 돌풍을 일으킨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시골의사' 박경철의 청춘 콘서트가 대표적이다. 하반기엔 토크쇼 형식의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가 그 열기를 이어받았다. 상반기 폭발적 인기를 끈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와 작년에 이어 열기가 계속된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하반기 베스트셀러 '닥치고 정치'도 강연 혹은 문답식이었다.

지각변동의 진앙은 SNS다. SNS는 대중을 담론의 장으로 끌어들였고, 동시에 흥분시켰다. 학계는 분석하느라 바빴다. 국내 학술지 검색 사이트인 디비피아(DBPIA)는 올해 가장 많이 내려받은 논문 100편 중 1위를 비롯한 25편이 SNS 관련 논문이었다고 밝혔다.

◇인포테이너시대의 도래

대중의 '사고 흐름'을 이끈 것은 교수, 지식인 그룹이 아니라 '인포테이너'들이었다. 배우, 개그맨, 의사, 스님, 판사가 주요 현안에 대해 멘토 역할을 떠맡았다. 창백한 지식인은 '순발력 좋고 명랑한' 멘토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있다. 연말 독서계를 강타한 '닥치고 정치'의 저자 김어준은 그 절정이다. 이 책 서문은 단언한다. '어떤 이론에도 없는 무학(無學)의 통찰.'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20세기 우리 사회를 이끌었던 것은 언론과 교육이었고 그 핵심에 지식인이 있었던 반면 지금은 그들이 왜소해진 상태"라고 했다. 대다수 교수들이 미시적 지식 생산에 몰두하면서 큰 그림에 대한 감각은 놓치거나 따라잡을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 "순발력 좋은 논객들이 순간 임팩트에 강한 소셜미디어를 통해 오디언스를 장악하다 보니 정작 양질의 성과물이 있어도 대중과 접촉하는 지점은 희소해지고 있다"고 송 교수는 말했다.

◇'이기적 진실'

SNS는 유통되는 지식과 정보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김은미 서울대 교수 등이 지난 7월 낸 'SNS혁명의 신화와 실제'(나남)에 따르면 소셜미디어 안에서는 정보와 오락이 뒤섞인다. 사적 대화와 공적 커뮤니케이션도 공존한다. 여기서는 무미건조한 사실이나 엄밀한 진실보다는 가설, 패러디가 더 환영받는다. '듣보잡' '빅엿' 같은 축약어는 해당 집단이 공유하는 정서와 문화적 코드를 보여준다. 정보 습득과 사교, 놀이가 합쳐지면서 사실에는 의견과 느낌, 선호가 혼합돼 빠르게 유통된다. 이른바 '이기적 진실'의 출몰이다. 김어준은 '닥치고 정치'에서 말한다. "반론은 받지 않는다. 열 받으면 니들도 이런 거 하나 쓰든가."

학자들은 어떻게 보나. 정일권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는 "SNS상의 대화는 소통 자체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 주목적이기 때문에 진위의 잣대로 억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반면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소통에는 의견의 표명 외에 여러 의견을 종합해 그 중 합리적인 것이 뭔지를 밝히는 것까지 포함된다. 그 점에서 소셜미디어는 이성적 답변을 끌어내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 그 자체가 답이 될 수는 없다"고 했다.

◇보수·진보 막론 과제는 공감

지식사회는 이제 진리 추구 외에도 소통과 공감을 숙제로 안게 됐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SNS의 득세는 대학에서 생산된 지식 또한 대중과 공유돼야 할 부분이 커지고 있음을 뜻한다. 학계도 일반의 공감을 얻는 데 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했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진화론을 들어 공감의 중요성을 말했다. "다윈 이론을 깊이 들여다보면 성공한 생물은 다들 공생 파트너가 있었고, 인류 진화 과정에서도 상대의 감정 읽기가 결정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회 발전에서도 핵심 요소가 경쟁보다 공감의 속성들이란 점이 부각되는 추세"라고 했다. 송호근 교수는 "결국 지식사회와 SNS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무시하거나 외면하기보다는 공존 병립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면서도 소통의 건강성을 위한 '교양시민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제 우리 사회의 미래는 교양시민층을 어떻게 얼마나 길러내느냐에 달렸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