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2 신년특집] "자식에 몰빵 땐 쪽박"… "은퇴 후 쓸 돈 아니라, 돈 벌 몸 만들자"

"낼모레 50인데 우리 애는 이제 6학년밖에 안 됐고 큰일이다." 조광제씨가 말문을 열자 쌈밥을 입에 넣던 허영진씨가 면박을 줬다. "좋겠다. 내 딸은 열한 살이다. 앞으로 내가 20년 더 일해야 딸 취직하는 거 볼 판이다."

지난 28일 오후 부산 명륜동의 한 음식점에 부산 동래고 동창생 5명이 모여 앉았다. 은퇴·노후 이야기가 이날의 안줏거리. 이들은 "나 같은 자영업자는 국민연금도 한 달에 24만원밖에 못 탄다" "외벌이로는 늙어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겠어." "자식한테 '몰빵'하면 늙어서 '쪽박' 찬다던데"라는 말들을 소주잔처럼 주고받았다.

이들은 1963년 즈음에 태어나 1982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0대에 서울올림픽을 지켜봤고, 30대에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돌파 뉴스를 들었고, 이제 49세 안팎이 됐다. 이들은 재무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은퇴 준비가 되어 있을까.

본지는 1982년 고등학교를 함께 졸업한 부산 동래고 58기와 부산상고 69기 졸업생 각각 30명씩 60명의 재무적 은퇴준비도를 일일이 조사했다. 은퇴 시점에 받을 퇴직금과 국민연금·개인연금, 현금화할 수 있는 금융·부동산 자산 등을 물어본 뒤 삼성생명의 평생소득 계산기를 이용해 구해 냈다. 조사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은퇴 후 필요 생활비는 한 달 239만원으로 동일하게 맞췄다. 통계청의 2011년 가계금융조사 결과 은퇴를 앞둔 가구가 바라는 한 달 적정 생활비의 평균이다.

이 60명의 평균 은퇴준비도는 100점 만점에 61점이었다. 이들은 동창회와 연락이 닿는 졸업생인 만큼 어느 정도 안정된 직장에서 평균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봐야 하는데도 은퇴 준비도는 높지 않은 수준이었다.

이들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저축·주식·펀드 등 금융자산은 얼마일까. 자산은커녕 빚만 8000만원 있다는 응답부터 15억원이라는 응답까지 다양했다. 60명의 평균은 1억5100만원이었다. 물론 이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금융자산을 은퇴 후 필요할 때 모두 꺼내 쓸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자녀 학자금과 결혼자금 등 은퇴 전에 목돈이 들어가야 할 구멍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은 한 푼도 없다는 사람도 있었고, 50억원 상당을 가지고 있으니 적어도 돈 문제는 없다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60명의 평균 부동산자산은 4억7200만원이었다. 물론 대부분은 현재 살고 있는 집이다. 은퇴 이후 자신의 부동산 일부를 팔아 노후자금으로 활용할 계획이 있는지를 물었을 때 60명 중 24명(40%)만 그럴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나머지는 '부동산엔 손대고 싶지 않다'거나 '부동산은 상속하겠다'고 대답했다. 은퇴자금으로 쓸 수 있을지 불분명한 금융·부동산 자산을 뺀 이들 60명의 은퇴준비점수는 평균 54.7점이었다.

다시 동래고 동창모임 자리. 은퇴 얘기를 나눌수록 어깨가 더 처질 법한데 그러진 않았다. 차주진씨가 "까짓것 70살 넘어서도 꾸준히 일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자 김영규씨가 "늙어 쓸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늙어서도 돈 벌 몸을 만들면 된다"고 했다. 조광제씨가 건배사를 날렸다. "내년에 50살 될 때도 똑같은 고민일 거다. 최선 다 하면 되는 것 아니냐. 건강하자 친구들아.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