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① 1920년대 히트영화 ‘장한몽’… 소설가 심훈이 이수일 역

1920~1930년대 조선일보는 영화·연극·고전음악·무용 등 다양한 예술 장르와 축구·배구·야구·스키 등 스포츠처럼 이 땅에 들어와 꽃피기 시작한 새로운 근대 문화의 탄생을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사회상을 새롭고 다양한 시각으로 조명했던 ‘조선일보에 비친 모던조선’에 이어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을 매주 월·수요일 게재합니다.

이 땅에서 영화 제작이 걸음마를 시작한 1920년대 초·중반의 대표적 히트작 중 하나가 이수일과 심순애의 러브스토리인 이경손(李慶孫) 감독의 '장한몽'(長恨夢·1926년작)이다. 일본소설 '금색야차'(金色夜叉)를 번안한 조중환의 소설로, 신파극으로 유명한 러브스토리가 1926년 계림영화집단의 창립작으로 처음 영화화되자 개봉관인 단성사 앞은 장사진을 이뤘다. 필름은 전하지 않지만, 스크린 속에서 망토를 걸친 채 "김중배의 다이아먼드가 그렇게도 좋더냐!"고 통탄하는 이수일 역 배우는 뜻밖에도 농촌계몽소설 '상록수'의 작가로 문학사에 남은 심훈(沈熏)이다. 영화 개봉 당시 조선일보 기사 속 '리수일 역'으로 보도된 '신태식'은 심훈이 쓴 가명이었다.(조선일보 1926년 3월 1일자)

우리 영화 사상 최초의 이수일 연기를 소설가 심훈이 맡은 데엔 사연이 있다. 처음엔 주삼손이 이수일을 맡아 촬영 중이었는데, 도중에 갑자기 하차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대안을 찾던 영화사는 영화에 관심 많던 곱상한 문필가 심훈을 캐스팅해 영화배우로 데뷔시켰다.'장한몽'에는 나운규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조선일보 기사는 "촬영 도중에 주삼손이가 라운규와 가티 그곳을 탈퇴"했다고만 적고 있을 뿐 구체적 이유는 밝히지 않고 있다.(1938년 1월 3일자)

'장한몽 주연 교체' 사태는 초창기 우리 영화계의 어수선한 단면을 보여준다. 제작사는 심훈으로 전면 재촬영을 하는 대신, 주삼손이 출연한 전반부에 심훈이 참여한 후반부 필름을 이어붙여 개봉했다. 오늘로선 생각하기 힘든 '1역 2인'의 기형적 영화였다. "리수일이가 두 사람이 되여서, 관객들의 우슴보를 터지게"(1938년 1월 3일자)했다. 그래도 모처럼 완성도 높은 국산영화였던 '장한몽'에 대해 관객도 평단도 호의적이었다. 배우가 바뀐 것을 문제삼지 않을 정도였다.

'장한몽'의 성공에 고무됐는지, 심훈은 내친김에 영화감독에 도전했다. 1927년 메가폰을 잡고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각색한 '먼동이 틀 때'를 내놓았다. 이 작품은 "우리가 모든 조선영화를 살러(불태워) 버린다면 이 영화를 남겨 놋는데 과히 붓그럽지 안타'(1929년 1월 27일자)는 극찬을 받았으나, 흥행은 신통치 않아 제작사가 파산했다. 그래도 심훈은 1927년 2월 일본에 건너가 교토(京都)촬영소에서 3개월간 영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귀국해 "조선영화를 위하야 노력하겟다"고 밝히기도 했으나(1927년 5월 13일자) 영화인으로서의 활동은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1928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심훈은 1931년까지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영화의 꿈을 글 속에 풀어냈다. 숱한 영화평은 물론, "돈에 먼저 눈을 뜨는 경영자의 지배 하에서…과연 뛰어난 작품이 나타날 수 있을까 의문"(1928년 4월 18일자)이라는 등의 날카로운 칼럼도 남겼으나, 1936년 장티푸스에 걸려 안타깝게도 36세로 삶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