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 저축왕… 잔액은 그들에게 삶이었다

건설 현장에서 벽돌 쌓기로 한 달 250만원을 버는 이모(46)씨의 별명은 '차돌'이다.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도 뽑아 먹지 않고 버는 돈의 97%를 저축해 얻은 별명이다. 그러나 몇 년 전만 해도 땅에 500원이 떨어져 있어도 손에 흙이 묻을까 줍지도 않던 이씨였다. 영어 학원 강사였던 이씨의 인생은 2008년 주식 투자에 손을 댔다가 8개월 만에 1억원을 날리면서 곤두박질쳤다. 2007년 이혼의 아픔을 겪고 35만원짜리 월세방에서 생활하던 그는 하나뿐인 딸을 위해 빨리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에 주식 관련 책 몇 권을 읽은 뒤 대박을 터뜨리겠다는 환상에 빠졌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금융 위기로 주가는 폭락했고 빈털터리가 됐다.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이씨는 물로 허기를 때우며 밤에도 불이 켜진 병원을 전전하다가 2010년 4월 서울의 한 아파트 옥상에 올라 자살을 결심했다.

그 순간 이씨의 머릿속에 딸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에게 이렇게 나약한 모습만 보여주고 세상을 떠나는 게 옳은 일일까?' 이씨는 옥상에서 내려와 근처 경찰 지구대를 찾았고, 노숙인 쉼터를 소개받았다.

쉼터 상담사는 이씨에게 "더는 떨어질 곳이 없으니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 노숙을 벗어나려면 저축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했다. 이씨는 이때부터 건설 일용직에 나섰고 푼푼이 모은 돈을 저축하기 시작했다.

현재 이씨의 통장에는 1950만원이 모였고, 그는 "3년 뒤에는 모은 돈으로 독립해 학원 일을 다시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씨는 서울시가 2일 발표한 '올해의 노숙인 저축왕' 70명에 포함됐고, 이 중에는 이씨같이 노숙인 처지에서 저축을 통해 새 삶을 얻기 시작한 사람들이 올라 있다.

필리핀 여성 에이미(가명·37)는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2000년 2월 한국에 왔다. 남편은 매일 저녁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 에이미와 아이들을 때렸다. 에이미는 결국 이혼을 택했고 아이들과 거리를 헤매다 노숙자 쉼터를 찾았다. 에이미는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알아 미국인 가족의 아이를 돌보는 베이비시터로 일하게 됐다"고 말했다. 쉼터에 있는 에이미는 매달 생활비와 교육비로 15만원 정도만 쓰고 나머지는 전부 저축해 600만원가량을 모았다. 아이들이 피자, 햄버거가 먹고 싶다고 조를 때 가슴이 쓰리지만 꾹 참았다. 에이미는 임대주택에 들어가 아이들과 길거리를 헤매지 않는 게 가장 절실한 소망이다.

사업가이던 정모(54)씨는 공장이 망하면서 노숙인으로 전락했다가 '빚을 갚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저축을 시작했다.

2000~2008년 경기도 구리시에서 목걸이·귀걸이 등을 만드는 공장을 운영했지만, 저가(低價) 중국 제품에 밀려 파산했다. 동네 빈 공장에 몰래 숨어들어 잠을 자며 떠돌던 정씨는 2009년 5월 을지로 일대에서 노숙하다, 노숙인 쉼터 직원을 만나면서 고시원에 정착했다. 정씨는 희망근로 등을 통해 번 돈을 모아 매달 고시원비와 식비 등 30만원을 제외하고 남는 돈을 모두 통장에 부었고, 어느덧 저축액이 1500만원을 넘었다. 정씨는 "가족과 빨리 다시 만나고 싶어 저축왕에 도전했다"며 웃었다.

서울시는 23개 보호시설에서 생활하는 노숙인 1222명 중 저축률이 높은 70명을 저축왕으로 뽑았다. 이들은 작년 4월부터 지난 11월까지 4억6000만원을 벌어 그중 절반 이상(57%)인 2억6000만원을 저축했다. 서울시는 상위 10%인 7명에게 상장을 수여하고, 70명 전원에 대해서는 '희망플러스통장' 가입자로 추천할 계획이다. 서울시가 2007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희망플러스통장'은 저소득층 가족이 월 5만~20만원씩 3년 동안 돈을 부으면 후원자가 같은 액수의 돈을 입금해주는 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