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 기증 약속한 노부부… 그 뜻 지켜준 딸들

"부모님은 봉사를 당연하게 여긴 분들이셨어요. 우린 아버지 뜻대로 한 것일 뿐이에요."

황경숙(42)씨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아버지 황영건(72·사진)씨의 장례를 치른 뒤라 지친 기색이었지만, 목소리는 또렷했다.

새해 첫날인 지난 1일 갑작스러운 뇌경색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딸들의 고민이 시작됐다. 부모님은 이미 2002년 서울 서초동 성당에서 시신 기증을 약속한 터였다. 지난해 5월 어머니가 급성폐렴으로 돌아가시고 시신 없이 장례를 치렀던 딸들은 그때의 섭섭함을 떠올리며 처음엔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황씨와 동생은 "이번에도 아버지 뜻을 따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동의했다"고 말했다.

부모님의 봉사 생활이 시작된 것은 1985년쯤이다. "돈으로보다는 남을 직접 도와보자"고 어머니가 말했고 부부는 겨울 서초동 판자촌을 찾아가 쌀과 연탄을 나눠주었다. 이후엔 아직 학생이던 딸들과 함께 나환자촌을 찾기도 했다. 아버지가 1998년 해군 군무원을 정년 퇴임한 뒤 가족들의 봉사 활동은 더 활발해졌다.

'쪽방촌 슈바이처'로 불리던 고(故) 선우경식 원장의 요셉 의원에서 노숙자를 씻기고, 이발도 해주었다. 봉사 활동 하는 성당 교우들과 모임을 만들고 시신 기증도 약속했다. 딸 황씨는 "아버지는 당시 사람은 어차피 흙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서울성모병원에서 장례를 치른 황씨의 시신은 가톨릭대 의대 학생들의 해부 실습에 쓰인다. 대학 관계자는 "부부가 모두 시신을 기증한 사례는 아주 드문 것으로 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