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떠나신지 1년… 그 나목(裸木)엔 푸른잎이 돋아납니다

5일 오후 작가 박완서(1931~2011)의 큰딸 호원숙(58)씨가 경기도 파주출판단지에 있는 출판사 열화당에 들어섰다. 22일이면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년. 1주기 기념 출판으로 고인의 데뷔작인 장편 '나목'(裸木)을 복간하는 편집회의 자리다. 파주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열화당 이기웅(72) 사장이 두 손 모아 맞는다. 책상 위에는 '여고생 박완서' '새댁 박완서' '아기 엄마 박완서' 등 열 장 넘는 고인의 사진과 자료가 분방하게 놓여 있다.

'나목'은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서 1남 4녀를 둔 가정주부 박완서가 마흔의 나이로 당선됐던 작품. 첫 소설이자 본인의 장편소설 15편 중에서 가장 편애한다고 고백했던 작품이다. 고인은 글이 안 써질 때마다, 글 쓰는 일에 넌덜머리가 날 때마다 '나목'을 펴 본다고 했다. 말 그대로 초심(初心). "몇 장 읽어내려가다 보면 얄팍한 명예욕, 습관화된 매명(賣名)으로 추하게 굳은 마음이 정화되고 부드러워진다"고 했던 데뷔작이다.

열화당이 '박완서 1주기' 기념으로 '나목'을 펴내는 이유는 뭘까. 게다가 '나목'의 현재 판권은 세계사에 있는데 말이다. 지금은 미술과 사진 출판의 명가로 알려져 있지만, 여성동아 별책 부록이던 '나목'을 1976년 별도 단행본으로 처음 펴낸 곳이 열화당이었다. 1970년대 서울 청진동 시절, 열화당은 김현·김병익·김주연·김치수의 문학과지성사와 사무실을 나눠 썼다. 이기웅 사장은 "대작가의 1주기를 맞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면서 "직원들이 의아해한 결정이었지만, 열화당의 초심과 작가 박완서의 초심이 통한다고 봤다"고 했다.

열화당의 '나목'은 세로쓰기 특별 한정판이다. 일련번호 붙여 300부만 인쇄한다. 책도 잘 사보지 않는 현실에서 가로쓰기도 아닌 세로쓰기 판형, 게다가 소설 본책 이외에 부록 별쇄본도 있다. 별쇄본에는 수필가인 큰딸 호원숙이 쓴 '엄마의 나목', 지난 40년 동안 출판사를 달리하며 복간됐던 '나목'의 표현 대조표, 박완서가 말하는 '나목'과 박수근, 당시 일반 독자들의 독후감 11편 등이 포함된다. 이메일이나 인터넷 서점의 댓글이 아니라 육필 편지와 엽서로 우표 붙여 보내온 독후감들. 이 사장은 "디지털에 대한 저항으로 '기념'의 의미가 강하다"면서 "(판권을 가진) 세계사 최선호 회장도 이런 이야기를 듣고 껄껄 웃으며 '300부 이상은 절대 안 된다'며 한정판 출간을 양해했다"고 말했다.

큰딸 원숙씨는 "파주 오려고 내비게이션 주소를 찍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고 했다. 출판단지가 있는 파주는 박완서와 가족에게 각별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 느닷없이 발발한 6·25로 그해 서울대 국문과에 합격했던 '대학생 박완서'가 학업을 포기하고 가족과 함께 피란 갔던 곳이다. 개성 아래 개풍이 고향인 작가는 모두들 남쪽으로 피란 가던 그때 임진강 아래 교하리로 갔고, 가족은 강제로 찢기고 일부는 북으로 끌려가는 고난을 겪었다고, 자전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 적었다. 일찍 여읜 부친 때문에 아버지 같던 삼촌과 친오빠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것도 그때였다.

어머니 박완서가 여생을 보냈고, 지금은 자신이 지키고 있는 경기도 구리 아치울 집 마당에는 이 겨울, 살구나무와 백일홍이 잔가지를 쳐낸 채 앙상한 나목(裸木)으로 서 있다고 했다. 1년 전만 해도 사시사철 '엄마'의 손길과 눈길이 닿았던 나무들이다. 1년이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치울의 나무들은 하얗게 벌거벗었지만, 파주 교하리에서 작가와 작품은 다시 푸른 싹을 틔우는 중이다. 사진 속의 선생이 환하게, 수줍게 웃고 있다. 방 안의 푸른 훈기(薰氣)에 이날 영하 17도까지 떨어졌던 파주의 추위도 순간 무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