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1억 기증… "인생 2막도 연극과"

"노조활동을 하면서 어려운 학생들을 많이 봤어요. 몇명만이라도 그들을 돕고 싶어서…. 적은 돈이지만 뜻있게 쓰였으면 해요."

지난달 31일로 21년6개월의 인천시립극단 단원 생활을 마무리하고 정년 퇴임한 연극인 김용란(56)씨.

'시립극단에 남아있는 유일한 창단 멤버'였던 그녀가 퇴직금 1억원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몸으로 딸을 기르며 연극인의 길을 걸어온 만큼 전혀 넉넉지 못한 형편이다. 기다리는 일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어려운 사람들의 형편을 헤아리는지도 모른다. 장기와 시신 기증을 약속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무슨 일이 생겨 내 마음이 변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다시 찾아가지 못하게(웃음) 장학회 같은 형태로 가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그는 업무상 10여년 동안 알고 지내며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인천극단 '10년후'의 최원영(58) 대표에게 이 돈을 맡기고 '처분'을 부탁했다.

"원금을 다 까먹어도 상관없어요. 몇년만이라도 버티다 보면 그걸 보고 또 누군가 뒤를 이어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으니까요." 그는 최 대표에게 돈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뜻을 살리기 위해 최 대표는 요즘 주위 사람들과 함께 이 돈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방안이 어떤 것일지 연구하고 있다.

서울 출신인 그는 1975년 극단 '에저또'에 입단하면서 연극인의 길에 들어섰다. 어려서부터 뭔가 만들고 장식하는 것을 좋아했고, 연극보다는 무대 장식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연극판에 자주 다니다 보니 극단에서 운영하는 연극 교육에도 참가하게 됐다. 특히 당시 베트남전 때문에 연극판에도 한 주류가 돼있던 '반전극(反戰劇)'에 '필이 꽂혔다'. 결국은 다니던 간호대도 그만두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쓴 채 연극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 뒤 대학로에서 차츰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할 무렵인 1990년 인천시립극단이 창단하면서 이를 이끌게 된 대선배 윤조병 예술감독이 그를 불렀다.

"고민했어요. 이제 서울에서 막 이름을 알려 나가던 참이었거든요. 그런데 윤 감독님이 그러시더군요. '네가 뭐가 되려고 하지 말고 시립극단의 뿌리가 돼달라. 극단이 잘 되게 다독거리는 맏언니가 돼달라. 대한민국 최고의 극단을 만들어보자'고…. 그 길을 택했죠."

그 뒤 출연한 작품이 100여편.

초창기에는 오직 연극 하나만 보고 달렸다. 제작 예산이 부족해 소품을 충분히 구할 수 없을 때마다 집에 있는 바구니며 이불이며 모두 들고 나가 메웠다. 싼 원단을 사다가 수백벌의 옷도 만들고, 후배·동료들과 함께 표를 들고 공단이고 학교고 아파트단지고 안 가본 곳이 없다. 그래도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그 일을 했고, 관객은 줄 섰다가 돌아갈 정도로 넘쳐났다.

하지만 시대가 빠르게 바뀌면서 연극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갈수록 줄었다. 게다가 후임 감독과 단원간의 불화로 여러 동료가 극단을 떠나는 아픔도 겪었다. 예술인과 노조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때도 맏언니로서 '떠밀려' 2년간 노조위원장을 했다.

"나도 몇번 그만두고 싶은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창단 단원으로 품위있게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죠."

이렇게 인생 1막의 퇴장을 준비하며 그는 시립극단에 관련된 사진과 기사 등 여러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는 이번에 438쪽짜리 책자로 묶여 극단의 첫 '역사'가 됐다.

이젠 맘대로 놀면서 지역에 그럴듯한 연극제를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그에게 '연극인의 길을 걷고 싶어하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주문했다.

"연극은 인문적 바탕과 예술적 경험이 두루 필요한 종합예술이죠. 책을 많이 읽고, 세상 경험도 많이 한 다음 연극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무엇보다 화려한 것만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