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의 세상읽기] 王의 기품, 고달픈 匠人의 손으로 되살아나다

조선 500년을 스물일곱분의 임금님이 다스렸다. 그 용안(龍顔)은 당대 최고의 화가들만이 그릴 수 있었다. 바로 어진(御眞)이다. 어진은 서울 종묘와 전주 경기전(慶基殿)과 함흥본궁에 나눠 보관했다. 숫자가 60~70점에 달했다고 한다.

'개혁군주'로 알려진 정조의 어진은 그중에도 일품이었다고 한다. 김홍도와 이명기의 합작품으로, 남아있다면 국보로 지정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경기전 것이 노인 때, 함흥본궁 것이 50대 장년기 때의 모습이었다.

1900년 이전 제작된 것 중 남아있는 어진은 네점뿐이다. 태조, 영조, 고종만 멀쩡하고 철종은 불에 타 반쪽짜리다. 6·25 전쟁은 사람뿐 아니라 그림에게도 횡액(橫厄)이었다. 부랴부랴 싸들고 부산의 한 창고에 보관 중이었는데 환도(還都) 이틀 전날 밤 불이 났다.

옛사람들이 초상화에 가한 호사(豪奢)가 있다. 유소(流蘇), 즉 매듭 장식이다. 어진이 제일 화려하고 6m나 될 만큼 길며 공신(功臣), 유명 사대부 순으로 유소에도 격이 있었다. 어진과 함께 유소도 비극의 그날 밤 사라져버렸다.

그 유소가 최근 다시 살아나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 한쪽 동림매듭공방의 심영미(沈永美·66)관장에 의해서다. 하늘 푸른 날 마주한 한복차림의 심씨는 순탄치 않은 삶을 겪었다. 그게 예인(藝人)의 팔자인 모양이다.

그의 선친은 지금은 없어진 백남공고의 이사장이었다. 그 부유했던 집안이 한순간 풍비박산 났다. 역시 6·25 전쟁 때문이었다. 인민군은 후퇴하며 선친을 납치해갔다. 정확한 사망날짜를 모르지만 가족들은 매년 칠석(七夕) 때 제사를 모신다.

"꿈만 꾸면 칠월칠석에 아버지가 보였어요. 서대문형무소에 계실 때 면회 간 기억밖에 없습니다." 심영미는 위로 두 오빠와 언니를 뒀다. 셋은 대학까지 마쳤지만 막내인 그에게 돌아온 교육의 혜택이라곤 초등학교가 고작이었다.

매듭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열아홉 살 때 이뤄졌다. 당시 그의 가족은 서울 신당동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가 하는 청과상이 유일한 생계였다. 어느 날 살림 말고는 할 일이 없던 처녀는 누군가의 소개를 받아 근처 금호동의 한 집으로 마실을 갔다. 신기하게 그곳에선 남자들이 매듭을 만들고 있었다. 그걸 눈으로 훔쳐보며 매듭 하나를 엮은 순간 한 노인이 "손끝이 맵다"며 "세벌 국화에 난간치는 매듭을 만들어보라"고 했다.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엮어내니 노인의 안색이 변했다.

"이런 솜씨가 다 있나!" 그 노인이 훗날 스승이자 시아버지가 된 류천만옹이었다. 류씨 집안은 궁(宮)에서 매듭을 만들던 왕고모로부터 기술을 받아 가업으로 꾸려나가고 있었다. 매일 아침 재료를 받아다 오후에 완성한 매듭을 가져다주던 처녀를 한 사내가 눈여겨보고 있었다. 류옹의 셋째 아들 류무웅이었다. 그는 심영미가 선을 보고 시집을 가려 할 즈음 "영미 아니면 죽겠다"며 약을 삼켰다. 국립의료원에서 위를 세척하고 살아난 그는 "결혼해 달라"며 생떼를 썼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니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격이었다. 연분(緣分)이란 그런 것인지 곡절 끝에 스물일곱살 심영미는 류씨 가문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심영미의 손에서 미학(美學)이 샘솟았다. 복주머니와 은장도를 다는 잡패, 붉은 산호와 백옥나비 한쌍과 밀화불수(蜜花佛手)를 다는 낙지발 대삼작 노리개, 고결함의 상징인 매미 노리개, 금 호리병 삼작 노리개, 수꽃무늬 수저집…. "유물을 보지 않고 나름대로 술과 매듭을 엮었는데 유물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 작품이 나온 적도 있었어요. '옛 장인들과 내가 통했구나' 하는 생각에 스스로도 대견해지더군요."

그가 세운상가에 만든 동림(東琳)공방이란 상호는 서울대를 나와 평생 거사(居士) 노릇 하던 친정 오빠가 지어준 것이다. 그는 "영미사로 하면 돈을 원도 없이 벌 것이요, 동림사로 하면 이 계통에서 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과연 오빠는 앞날을 보았는지 동림은 장안을 제패하는 일등 상회가 됐다.

돈깨나 벌던 그가 사라진 매듭을 살리는 일에 나선 건 복식문화원장 유희경 박사를 만나면서부터다. 그는 박규수가 쓴 복식연구서 '거가잡복고(居家雜服考)'를 내밀었다. 거기서 본 잡패를 재현하자 2007년엔 용인대 박지선 교수가 "공신의 유소를 살려보라"고 권했다. 그때부터 그는 경기도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전주태조어진박물관 등에 몇 점씩 남아있던 유물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맥이 끊긴 다양한 다회, 망수기법과 바늘 끝에 구멍 없는 술 제작법까지 다 자기 것이 됐으니 천직(天職)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심영미의 가업은 이제 4대째로 접어들었다. 며느리 박진영이 가세한 것이다.

사족(蛇足)-심영미가 세운상가를 떠나 지금 살고 있는 성산동으로 이사 온 것은 학교폭력 때문이었다. 광희중학에 다니던 큰아들이 선배들에게 맞고 책가방을 빼앗기자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곳을 떠났다. 맹모삼천(孟母三遷),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돌고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