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권력은 혀끝에서 나온다

"We are 99%."

세계를 흔든 지난해의 월가 시위의 도화선은 이 세 단어였다. 작년 9월 캐나다 NGO 애드버스트가 내건 이 구호는 '상위 1%와 나머지 다수 간 부의 불균형'을 강력한 상징어로 요약했다. 이 구호는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으로 거의 동시에 뻗어나가며 도시를 흔들었다.

지난 11일 오전 11시 청계광장의 시민발언대. 연단 뒤쪽엔 '할 말 있어요'라고 적혔다. 서울시가 마련한 현대판 신문고. 오후 3시까지 30~80대 15명이 마이크를 잡았다. 독도 영유권 문제부터 공무원 불친절까지 말들이 쏟아졌다. 2010년 6월 지방선거 이틀 전 한 트위터 사용자가 제안한 '인증샷'은 이제 젊은이의 정치 관심을 대변하는 말이 됐다. 정치권은 이제 SNS 공간을 오가는 '말 조각'에 촉수를 세운다.

말이 권력인 시대다. 20세기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구에서"라고 했지만 21세기 권력은 혀끝에서 시작된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신간 '말과 권력'(한길사)에서 오늘날 민주주의를 '말의 경연에 의해 권력이 구성되고 정당화되는 체제'로 규정했다. 이른바 의사소통 민주주의다. 우리 사회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제도적 민주주의를 거쳐 '말의 경연으로서의 민주주의'로 진입했다는 분석이다.

◇말의 힘에 대한 관심

말의 힘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폭발적이다. "권력을 나누게 되는 새로운 질서, 균형, 조화…. 나의 글자가 그런 세상에 작은 시작이 될 것이다."(세종) 인기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는 한글 창제 이면의 권력 이동을 다뤘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출간된 책 '인민의 탄생'에서 "훈민정음의 창제와 사용은 역사의 객체이면서 통치 권력의 대상인 인민을 역사의 주체로 변조하는 가장 중요한 계기이자 인민을 통치 권력의 중앙 무대로 진입하게 하는 수단이었다"고 썼다.

말의 힘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누구의 말인가', 즉 발신자가 중요했다. 어명(御命)과 저잣거리 잡담의 무게는 비교도 안 됐다. 양찬승 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현재의 특징은 네트워킹을 통해 누구의 말이든 굉장히 빠른 시간에 다수에 의해 공유된다는 점에서 더 빨리 권력화할 수 있는 환경이 도래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로 연결된 다양한 플랫폼 상에서 말은 눈덩이처럼 힘을 불린다.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자체가 권력 구조가 되면서 말은 불특정 개인(혹은 집단)의 권력자원이 됐다.

황용석 건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과거 대중은 무기력한 원자의 합이었다면 이제 사회적 기반이 마련되면서 개인 속 공적 자아의 의사표현 욕구가 집단적으로 힘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선거철 프레임 전쟁은 시작됐다

말의 힘은 '프레임(frame) 이론'으로도 표출된다. '프레임 전쟁'의 저자인 조지 레이코프 미 캘리포니아(버클리)대 교수는 "프레임은 우리 뇌 속에 있으며, 우리의 상식을 정의한다"고 했다. 특히 선거에서 프레임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가령 보수 진영은 '세금 구제'란 말을, 진보 진영은 '부자 감세'라는 말을 쓴다. 2002년 대선 때는 '정치개혁' 프레임이, 2007년에는 '경제성장' 프레임이 주효했다. 작년 서울시 무상급식 찬반투표 때 등장한 '나쁜 투표' 구호 역시 프레임의 한 예다. 올해도 선거를 앞두고 일찌감치 '~집권플랜' 등 정치 담론을 담은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한나라당의 '보수' 폐기 논란 등 최근 정당의 정강정책 변경 소동도 '프레임 전쟁'의 일면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말의 경연문화 가꿔야

말의 권력화 이면에는 악플, 신상털기 같은 '말의 폭력화'가 있다. 웅변과 궤변의 변별도 숙제다. 윤평중 한신대 정치철학 교수는 "모든 말이나 담론의 가치가 등가는 아니다. 정부는 '공정사회'를 표방했지만 실제 정책과의 괴리 때문에 오히려 웃음거리가 됐다. '반값 등록금' 같은 구호는 누구나 좋아할 만하지만 비용 문제나 부수 효과는 감춘다. 공동체에 관한 고도의 사안일수록 간단명료한 구호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올바른 말의 경쟁 문화를 위해서는 정보 공개와 투명화, 말하기 교육 등이 따라야 한다는 주문도 있다. 양찬승 교수는 "다양한 경로로 말이 분출하고 있지만 의견의 타협은 매우 미진한 것은 모두의 숙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