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동네 수퍼마켓 사장들은 왜 처음으로 뭉쳤나

지난 10일 서울 관악구의 한 주택가 수퍼마켓. 오모(43) 사장이 한 업체의 라면 제품을 진열대에서 손이 잘 닿지 않는 맨 아래 칸으로 옮기고 있었다. 국내 최대 시장점유율을 가진 이 업체가 최근 라면 가격을 봉지당 50원씩 인상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주로 수퍼 주인들이 회원으로 가입한 회원 2만명 규모의 '좋은 수퍼 만들기 운동본부' 인터넷카페에서 이달 들어 12일까지 한시적으로 판매를 중단하거나 진열 방식을 변경하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일부 점주들이 실제 '행동'을 벌인 것이다.

가격을 올렸는데 왜 소비자가 아닌 수퍼주인들이 반발한 것일까. 문제는 출고가의 인상 폭이었다. 10년째 수퍼를 운영하고 있는 오 사장은 "과거에 가격을 인상할 때는 소비자가격 인상 폭의 70% 정도만 출고가를 올려 인상분의 30%는 대리점과 소매점 몫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엔 출고가를 45원이나 올려 우리에겐 사실상 돌아오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현재 카페측은 약 4000~5000개 정도의 수퍼가 행동을 벌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제조업체측은 "실제 판매를 거부한 곳은 그다지 많지 않다"며 "이번 가격 인상은 제조업체와 유통업체 모두 고통을 분담하자는 차원에서 단행됐으며, 대부분의 수퍼 점주들은 우리의 취지를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 카페와 SNS…곳곳에서 들끓는 사회

유통업계에선 전국의 골목마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수퍼마켓 점주들이 의견을 나누고 뭉칠 수 있는 채널을 마련하고, '행동'까지 벌인 이번 일이 앞으로 닥칠 '거대한 변화'의 시발점은 아닌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대형 제조업체에 반기를 든 이번 사건을 놓고 일부에선 "국내 수퍼마켓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란 말까지 나온다. 오 사장은 "하루 12시간씩 장사를 하면서 정해진 가격대로만 팔았는데, 이제 다른 지역, 다른 도시에선 얼마에 팔리고 어떤 조건에 거래가 이뤄지는지 등 각종 정보를 훤히 다 알 수 있게 됐다"며 "이런 지식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제조업체를 대할 때 큰 '협상력'을 얻게 됐다"고 말했다.

인터넷의 보급에 이어 트위터·페이스북 등으로 연결된 SNS(소셜 미디어)는 뿔뿔이 흩어져 있던 개인들이 순식간에 공동 관심사를 중심으로 뭉치고, 의견을 나누고, 손쉽게 행동에 나설 수 있는 토양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 공급자인 기업들은 더이상 '중심'을 자처하며 일방적으로 가격이나 마케팅 정책을 운용하기 힘든 상황이다. 미국 BOA(Bank of America)는 최근 직불카드 사용자들에게 월 5달러씩을 내게 했다가 페이스북을 통해 30만명이 항의성 글을 올리면서 한 달 만에 요금 정책을 철회하기도 했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갤럭시S 이전에 나왔던 스마트폰 모델 '옴니아2'에 대해 한 대당 20만원을 보상해주는 보상안을 내놓는 과정에서도 '옴니아2 집단보상 준비 카페' 등이 역할을 했다. 작년 6월 국내 12개 증권사 최고경영자들이 주식워런트증권(ELW) 부정행위와 관련해 검찰에 기소된 직후에는 SNS를 타고 순식간에 ELW 투자자들이 "집단소송을 해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하기도 했다.

◇많아지면 달라지는 세상, 기업도 변한다

국내에도 번역된 클레이 셔키의 저작 '많아지면 달라진다'(갤리온)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인터넷 및 SNS의 보급과 함께 옛날 같으면 친구들과 커피숍에서 주고받으며 사라지고 말았을 대화들이 인터넷 공간에 영원히 남아 누구나 접할 수 있게 됐다. 평범한 개인의 발언이라도 다수가 접근할 수 있고,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이런 특권은 과거 대형 미디어나 기업들이 큰 '비용'을 들여 독점적으로 누리던 권한이지만, 이제는 평범한 개인들의 손안에 이런 수단이 들어갔다. 전국의 '그린벨트'나 '공원용지'로 묶여 있는 토지의 소유주들 역시 지난 수십년 동안 개별적으로 시청이나 군청을 상대로 민원을 제기해오다가 '전국공원용지소유주연합'이라는 인터넷 카페를 통해 개인 사례들을 공유하고 관련 법률 지식을 쌓아가면서 힘을 얻고 있다.

장덕진 서울대 교수는 "법인(기업)에 대해 힘이 없던 개인들이 SNS를 통해 연대하면서 법인과 자연인(개인) 사이의 힘의 균형이 회복되는 측면이 있다"며 "많아서 달라진 사회가 항상 옳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현재는 그동안의 불균형이 해소되는 국면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요즘의 개인들이 갖는 경험은 확실히 과거와는 차원이 다르다. '위 메이크 프라이스'(우리가 가격을 만든다)라는 한 소셜 커머스 업체의 이름처럼, 소비자들이 공동구매나 소셜커머스 등을 통해 일상적으로 다양한 '가격 결정 행위'에 참여하기도 한다. 가격 결정 역시 더이상 제조업체나 서비스 기업의 배타적 권리로 인식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동훈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파편화된 개인들이 점점 쉽게 조직화되는 개인으로 바뀌는 만큼 정치적 이슈뿐만 아니라 소비자를 상대로 하는 기업 활동에 있어서도 큰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며 "앞으로는 기업들의 마케팅에서도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는 것이 마케팅의 혁신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