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5] 남녀 사랑 다룬 멜로 영화에 '저속 취미' 비난 쏟아져

조선일보 지면에는 1920년 창간 초기부터 '활동사진 상영' 기사가 쏟아졌다. 1919년 10월 단성사에서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가 공개된 직후여서 '움직이는 사진'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이 급속히 커져가던 시기다.

1920년 6월부터 5년간 조선일보 지면에 등장한 영화 상영 안내 기사는 84건. 이중 극영화로 보이는 활동사진은 '노톨담의 곱사등이' '하믈레트'(햄릿) 같은 외국 영화와 우리 영화 '국경' '춘향전' 등 38건인데, 뜻밖에도 다큐멘터리·계몽영화가 46건으로 더 많다. 그때의 극장 영화란 극영화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름엔 청결을 강조하는 '위생 활동사진'들이 관 주도로 제작돼 각지를 순회했고 '저금(貯金) 선전' '장질부사(장티푸스) 예방 선전' 등을 내건 활동사진도 상영됐다. 동경 대지진 때는 재난 기록 영화가 경성 시내 각 극장에서 일제히 상영됐다.(1923년 9월 11일자)

심지어 1923년에는 '녀자의 분만(分娩)하는 것을 실지로 촬영'한 독일의 기록영화가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돼 "매일 공전(空前)의 성황을 이룬다"고 보도됐다. 이 다큐는 "아즉 생산의 경험이 업는 일반 부인은 물론이요, 일반이 한 번 볼 만한 사진"이라고 소개됐다.(1923년 10월 2일자)

이처럼 초창기의 영화란 오락성 있는 극영화만이 아니었다. 엄숙한 지식인 중엔 '영화가 교육적이어야 한다'는 사람도 많았다. "대중은 영화 장르의 오락성에 열광했는데 지식인 중엔 책이나 음반을 넘어서는 '뉴 미디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영화학자 조희문)이었다.

1926년 제작된 이규설(李圭卨) 감독의 흑백 무성영화 '농중조(籠中鳥)'는 관객들 갈채를 받으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점잖은 식자층 비판도 받았다. 유교적 인습의 굴레를 떨치고 남녀가 사랑의 문을 두드린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조선일보 1926년 6월 12일자 영화평란에 기고된 짧은 글 두 편이 모두 '농중조'를 만든 조선키네마를 맹비난하고 있다.

'WY生'이라는 필자는 "왜 하필 그 따위 저급한 테마를 선택하엿는지 알수 업다"며 "저속 취미로 대중을 최면에 씨우려 하지 마라"라고 경고했다. 또 다른 필자는 "이왕 작품을 내려거든 재래의 모든 경험을 토대로 무슨 점으로던지 뛰여난 것을 보여다오"라고 했다.

사랑 이야기라는 소재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읽힌다. 그래도 활동사진 관객들은 이런 '비속한 이야기'의 재미에 점차 빠져갔다. 조선일보의 시리즈 '야(夜)경성 순례기'는 초창기 극장 안에서 시네마 천국에 빠진 대중 표정을 이렇게 전한다.

"때는 일곱시 반! 종로 큰 거리… 서울의 밤은 어두어 간다…. 여덜시 경부터는 문다친 극장안에서 오즉 환희의 우슴과 갈채의 박수가 때때로 문틈을 새여 길거리로 흘러나올 뿐이다.

이것이 오즉 서울 중산계급의 사람들이 시달린 머리를 쉬이며 삶의 위안을 받는 유일의 향락장(享樂場)이다. 스쿠링을 바라보고 조와하고 웃는 학생이 잇스면 부인석의 아양 피는 기생들을 건너다 보고 어리석은 깃붐을 짓는, 점잔타는 신사도 잇다."(1925년 8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