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사각 링은 비린내 나는 도시… 우리는 얻어터질 줄 알면서 기어이 올라간다

13일 오후 서울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작업실. 가로·세로 4m50㎝, 높이 70㎝의 금색 나무 단(壇) 위에 황금빛 밧줄과 쇠사슬이 흩어져 있다. 단의 네 귀퉁이에 설치된 높이 1m70㎝의 철제 기둥 역시 황금빛. 기둥과 기둥의 사이에 밧줄을 묶는 작업이 끝나면 찬란한 황금빛 링이 탄생할 것이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도시로 모여든다. 하지만 나는 도리어 죽기 위해 모여든다는 생각이 든다." 미술가 배영환(43)이 릴케의 소설 '말테의 수기' 첫 문장을 느릿하게 읊조렸다. 그는 올 3월 서울 태평로 플라토(옛 로댕 갤러리)에서 열릴 개인전 준비에 한창이다. 대규모 미술관 전시는 처음.

"링은 항상 존재하고, 복서들은 명멸한다.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대도 불분명한 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홀로 섀도복싱(shadow boxing·권투에서 혼자 하는 연습)을 하는 복서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서울 약수동에서 태어나 연희동에서 자라고 홍익대 앞에서 청춘을 보낸 배영환의 관심사는 줄곧 도시였다. 그는 1999년 개인전 '유행가2'에서 깨진 병 조각, 눌어붙은 껌 등 도시의 뒷골목에 버려진 남루한 재료로 판자 위에 유행가 가사를 적는 작업을 선보였다. 2000년엔 서울 시내 주요 노숙자 지원시설 정보를 담은 수첩 3만부를 만들어 '도시의 그림자'인 노숙자들에게 배포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 '노숙자 수첩-거리에서 2001'을 진행했다. 2008년 개인전 '불면증'에서는 술병 조각으로 만든 부엉이로 장식한 샹들리에를 내놓았다. 서울의 야경(夜景)을 형상화한 이 샹들리에는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에서 주요 소품으로 등장했다. 2009년엔 버려진 컨테이너를 문화소외지역 주민을 위한 도서관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간 도시의 밤과 비루한 뒷골목을 훑어온 그의 관심사는 이제 도시의 낮과 비열한 중심가로 옮겨졌다. 황금빛 사각 링은 도시라는 무대에 올라서고 마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엄격한 룰의 세계인 사각의 경기장에서 사람들은 강박적으로 싸우고, 쓰러지고, 일어서길 반복한다. "대낮의 태양 아래, 교사·은행원·기자 등 저마다 주어진 역할의 가면을 쓰고 자신을 은폐한 채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괴로울 줄 알면서도 사랑하고 마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도시라는 공간에 중독된 겁니다." 이번 플라토 개인전에서 황금빛 링은 로댕의 '지옥의 문'과 '칼레의 시민' 사이에 놓인다. "끔찍하고 괴기스러운 로댕의 '지옥'과 화려하고 아름다운 나의 '지옥'이 대비를 이루는 구조인 셈"이라고 작가는 설명했다.

배영환은 숨 가쁘게 살아가는 도시인들이 놓치고 있는 것들도 포착했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빈방을 설치하고, 서울 시내 사찰 열두 곳의 저녁 예불 종소리를 모아 편집한 소리를 들려줄 계획이다. 작품의 이름은 '걱정'. "절의 종소리는 제 귀엔 모든 중생을 걱정하는 부처의 마음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제 걱정만 하느라 정작 내 걱정을 해주는 거대한 존재를 잊고 있는 셈이죠."

그의 별명은 '재활용 작가'. 이번에도 '버려진 것'을 이용한 작업을 선보인다. 지난해 여름 원전 사고 피해지인 후쿠시마(福島)를 방문했다가 버려진 나뭇조각을 여러 개 주워왔다. 그 나무로 기타를 만들 계획이다. 자개장·재봉틀·화장대 등 버려진 가구들로 통기타 형상을 만들었던 2005년 개인전 '남자의 길'의 연장 선상인 이 작업은 "부귀영화를 가져주리라 믿었던 과학으로부터 배신당한 그 지역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신작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걱정한다' '투쟁한다' '기억한다' 같은 것들이다.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대인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형체 없는 행위들을 보여주고 싶다"고 작가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