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인생, 시나리오도 안보고 "나 안해"했는데…

14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정려원(31)은 "인터뷰 사진을 좀 예쁘게 찍고 싶다"고 했다. "표정 관리를 못 해서 이상한 모습의 사진들이 많다"는 것이다. 인터뷰할 때 살짝 입꼬리만 올려 미소 짓는 여느 여배우들과 달리 그는 눈과 입을 크게 벌려 놀라는 표정을 짓는가 하면 양미간을 힘껏 모아 얼굴을 온통 찡그리기도 했다. 정려원의 극적(劇的)인 표정과 몸짓은 감정의 물결에 따라 흔들렸다.

정려원은 정용주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네버 엔딩 스토리'(19일 개봉)에서 뇌종양 진단을 받은 은행원 오송경 역을 맡았다. 지난해 개봉한 곽경택 감독의 '통증'에서도 그는 혈우병에 걸린 동현을 연기했으니 '환자'역을 연이어 맡은 셈이다. 정려원은 "시나리오도 읽기 전에 '시한부 인생'이란 얘기만 듣고 '장난해? 안해'라고 대답했다"고 했다.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송경이가 저랑 완전 반대인 캐릭터예요. 송경이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계획해야 하는데 전 충동적이고 감정적이거든요. 이 역할로 관객들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으면 '꺄악'할 정도의 쾌감이 생길 것 같았어요." 그는 '꺄악'이란 말을 하면서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2009년 드라마 '자명고'와 이해준 감독의 '김씨 표류기' 이후 2010년 1년간 정려원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다. 집에 있으면서 뜨개질로 목도리만 16개를 만들었고, 그림도 그렸다. 왜 아티스트들이 힘들 때 창작욕에 불타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고 했다. "작품들이 흥행에 실패해서 힘든 거 아니냐"고 묻자 "절대 아니다. 남들이 반대해도 내가 원하면 가시밭길이라도 가는 성격이라 지금까지 출연작 때문에 후회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었고…더 이상 말하면 계약 위반이 될 것 같다"고 웃었다.

그 휴식을 가진 뒤 정려원의 호흡은 가빠졌다. 2011년 한 해 영화만 세 편('적과의 동침' '통증' '네버 엔딩 스토리')에 출연했고, 올해 시작되자마자 SBS 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에서 물정 모르고 제멋대로 살아온 재벌가 상속녀 여치를 연기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그가 맡은 역할은 이전에 비해 점점 밝아졌고 대중에게 더 가깝게 다가왔다. 정려원은 작품 선택 기준에 대해 "'적과의 동침' 때부터 변했다. 예전에는 어두운 역을 하면 아주 멋있는 줄 알았는데 쉬는 동안 내 작품을 돌아보니 그게 아니더라"고 했다. "눈물을 흘려도 캐릭터가 우는 게 아니라 정려원이 울고 있었어요. 화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연기로 그걸 풀었던 거죠. 배우는 자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얘기를 들어줘야 해요. '나한테 공감을 해달라'라고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공감해줘야 해요. 그게 배우로서 느껴야 할 책임감이에요."

정려원은 "나한테 코믹 배우의 피가 흐르는 것 같다"고 했다. 요즘 그가 연기하는 '여치' 캐릭터가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를 레드 와인색으로 염색한 채 욕설을 내뱉는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해내 호평을 받고 있다. 그는 "흥행작이 없어서 별명이 한때 '국밥'이었다. (작품을) 말아먹는다고. 여치 역을 맡기 전에도 PD님한테 '제가 하면 잘 안 될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다"고 했다. PD의 대답은 이랬단다. "당신은 메이저(주류)처럼 보여도 마이너(비주류)인 사람이다. 그래서 이 역할을 잘해낼 거라고 믿는다"고.

"대중에게 사랑받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대중이 열광하는 배우와 대중에게 신뢰를 주는 배우는 다른 것 같아요. '저 사람이 나오면 볼 만하겠다' 싶은 배우 있잖아요, 전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