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서 3代 함께 농사… "은퇴 없어 좋아요"

1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청계산 자락에 자리 잡은 태일농장. 3966.94㎡(1200평) 부지 위에 같은 크기 비닐하우스 15동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비닐하우스 안에 들어가 보니 한태호(36)씨가 헤드셋을 쓴 채 노래를 흥얼거리며 삽으로 흙을 뜨고 있었다.

같은 시각 한태호씨의 형 한태일(38)씨는 농장입구 비닐하우스에서 고추 모종 상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태일씨가 고추 모종을 점검하던 중 끽 소리를 내며 비닐하우스 문이 열렸다. "아버지 나오셨어요?" 태호·태일씨의 아버지 한인규(65)씨가 나타난 뒤 곧바로 할아버지인 한택수(87)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할아버지, 오늘 일찍 나오셨네요."

한태일씨 집은 현재 3대(代)가 서울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15대가 400년 넘게 같은 마을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고 있다. 이한호 서울시농업기술센터소장은 "서울에서도 간혹 젊은 영농후계자가 나오기도 한다"며 "하지만 한씨네 집처럼 3대(代)가 함께 농사를 짓는 건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태일씨는 2001년 대학을 졸업하고 농사를 시작해 10년 넘게 고추·상추·가지·토마토 모종을 기르고 있다. 3년 전부터는 국화재배를 시작했다. 동생 태호씨도 10년 넘게 출판사에서 출판디자인을 하다 3년 전 형을 따라 흙을 만지기 시작했다. 태일씨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 농장 1년 매출은 7000만원 정도였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3대가 힘을 모은 결과 연매출이 3억5000만원까지 늘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태일·태호씨 형제가 가업(家業)을 잇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태일씨는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게임제작회사에서 2년간 일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게임시나리오를 쓸 정도로 게임과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좀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1997년 경기도 수원의 경기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농사를 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붉은악마' 출범 때 운영을 맡을 만큼 축구광이었던 태일씨는 축구 관련 일을 하거나 일반 회사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태일씨는 대학졸업을 앞두고 생각을 바꿨다. 대학 시절 '한국형 가치투자전략'이란 책에서 본 가구산업 이야기가 영향을 미쳤다. 태일씨는 "가구 쪽에 여러 경쟁업체가 있었는데 사양산업이 되면서 하나둘씩 시장을 떠나 남은 회사가 독점 비슷하게 되는 바람에 입지가 더 탄탄해졌다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태일씨는 "농업인구는 계속 노령화되는 동시에 새로 유입되는 사람들 사이 경쟁도 별로 치열하지 않아 보였다"며 "이쪽에서 경쟁하면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버지 한인규씨는 대학 나온 아들이 농사를 짓겠다고 하자 반대했다. 농사일은 힘들고 사회적으로 대우도 못 받는 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태일씨는 자신의 포부를 말하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먼저 농사에 뛰어든 형 태일씨는 처음 3년간 적지 않게 고생했다. 하루일과가 끝나면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 파스를 달고 살았다. 태일씨는 일이 차차 익숙해지자 아이디어를 짜내 낭비를 줄여나갔다. 재배작물의 특성을 연구해 모종 배치를 달리하면서 난방비를 아꼈다.

태일씨가 전략적으로 농사일을 택했다면 태호씨의 경우는 '인생 2모작'에 해당한다. 태호씨는 1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늘 머리 한구석에는 퇴직 이후에 대한 고민이 떠나지 않았다. 출판디자인 쪽은 40대 중반만 되면 은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두기 2년 전부터 형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던 태호씨는 2010년부터 농장일에 합류했다. 태호씨는 "할아버지가 아흔이 가까워졌는데도 계속 일을 하시는 것처럼 농사는 은퇴가 없어 매력적이다"고 말했다.

한씨 형제는 '지식농업'을 위해 농한기가 되면 대학과 공공교육센터 등에서 농업기술수업을 듣는다. 일반 가정에서도 쉽게 기를 수 있는 모종을 개발하는 것이 한씨 형제의 '프로젝트'다.

"왜 대학까지 나오고 젊은 나이에 농사를 짓느냐"고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태일씨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가 강남과 10분 거리도 안 됩니다. 7살 난 아들은 365일 자연체험학습을 하고 있고요. 시간활용만 잘 하면 저만의 시간도 넉넉히 가질 수 있어요. 이만하면 지상낙원 아닌가요?"

아들과 손자와 함께 농사를 짓는 한택수씨의 마음은 어떨까. "아들, 손자들과 이 나이 될 때까지 일하는 게 행복해요.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