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땅~ 두드리다보면 어느새 예술작품이…

변방으로 쫓겨나기만 했다. 그의 조상은 서울에서 의정부로 밀려났고, 그도 양주시 안에서만 자꾸 외곽지대로 공장을 세 번이나 옮겼다. 시끄럽다는 민원도 있었고, 개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대장장이라는 직업은 명맥이 거의 끊어졌고, 3D업종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차인규(56)씨는 희망을 찾았다. 쇠를 달구고 망치로 때리면 즐겁다. 그가 인터넷에 내건 이름인 '쇠모루 대장간'처럼 갖은 시련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든든하게 버티고 있다.

◇천생 대장장이의 삶

지난 13일 양주시 남면 매곡리 벌판의 100평 남짓한 창고. 소음을 뚫고 5척 단구의 사내가 나타났다. 40년 넘는 망치질에 단련된 단단한 몸집과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차씨는 매일 아침 8시쯤 이곳에 나와 화덕에 괴탄을 넣고 불을 피우며 일과를 시작한다. 하루 내내 화덕에 쇠를 달구고, 모루에 올려 두드린다. 그는 "광적면 비암리 작업장을 7년 정도 썼는데 택지로 개발되는 바람에 2년전에 빌려서 이사했다. 하나씩 뜯어 옮겨 설치하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고 말했다.

차씨는 혈액에 철분 성분이 다른 사람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햇수로만 100년 남짓, 증조할아버지부터 4대째 대장일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증조부는 서울과 관서의 길목인 구파발에서 망치를 손에 잡았다. 양주에서 땔감을 실은 마차를 끌고 오면 구파발에서 도끼나 낫을 맡겼다. 서울에서 시장을 보고 돌아오며 벼린 연장을 되찾았기 때문에 이 일대에는 대장간이 제법 많았다고 한다.

증조부의 가업은 큰할아버지·할아버지로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의정부로 넘어와 '구파발 대장간'을 차려 유명해졌고, 다시 큰아버지로 이어졌다. 차씨는 그 밑에서 쇠와 씨름을 시작했다. 낮에는 대장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 고교에 다녔다. 군대를 제대하고 결혼하자 독립해 1988년 포천시 영북면에 '차씨 대장간'을 냈다. 그는 "간판 등 다른 일도 해봤지만 너무 안 풀려 대장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영화에서 영감을 얻어

그러나 호미, 낫을 찾거나 맡기는 손님은 점점 줄어들고 수입품에 밀려 설 자리를 잃었다. 오토바이를 몰고 더 시골 마을을 찾아갔고, 지뢰밭으로 들어갔다가 진땀을 흘린 적도 있었다. 아내와 남매를 먹고 살려야 했기에 자포자기 지경에 몰렸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처럼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영화 '배트맨'을 보고 "저게 바로 내 길이다"라며 무릎을 쳤다. 웅장한 저택의 철제 대문이 숨이 막힐 정도로 멋있었다.

차씨는 동두천의 책방을 누비면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외국 잡지나 상품 카탈로그를 구했다. 쇠로 일일이 만들어봤다. 도색 잡지를 찾는 손님으로 알던 주인도 괜찮은 책이 있으면 따로 골라서 건네줬다. 오로지 쇠를 달구고 두드리는 단조(鍛造)방식으로 대문, 벤치, 장식 등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다. 손재주가 좋았기에 10년 넘게 서울 논현동 가구거리의 대형업체에 납품도 했다. 그러나 기술은 인정받았지만 수입은 따르지 못했다. 대량 생산도 아니고 판로를 열기 쉽지 않았다.

차씨는 다시 독립을 했다. 2009년 2월에 인터넷 홈페이지(www.soemoru.com)를 열었다. 가장 원시적인 기술과 첨단 정보기술이 만났다. 홈페이지에 작품 사진을 올렸고, 일감도 늘어났다. 차씨는 "고객들이 추가나 변형 등 의견을 내면 맞춰서 제작을 하는 방식"이라고 소개했다. 최근에는 "인터넷에서 봤다"며 대구에서도 손님이 찾아왔다. 카페를 짓고 있는데 계단 난간, 테이블, 실내장식을 맡아달라는 주문이었다. 대학로, 홍대 앞 카페 등에도 그의 작품이 있다.

◇5대째 대장장이의 길

차씨의 대장간 한쪽에는 작품 30여점을 보관하는 공간도 있다. 철제 대문, 촛대, 실내장식 등 그의 땀이 스며들어 있다. 그는 "고물상에서 눈에 들어온 소재를 얻어서 만든 것도 있다"며 "비록 차가운 재료지만 수작업이 들어가면 정감이 살아난다"고 말했다. 또 "대장장이도 연장만 만들어서는 살아남지 못한다"며 "좋아서 두드리고 만들어내는 창작의 기쁨이 엄청나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제자도 생겼다. 자동차디자이너가 매주 토요일마다 찾아와 용접을 배운다. 차씨는 쇠모루 2개를 가보처럼 애지중지하며 보관하고 있다. 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형제가 가운데를 잘라 나눠가진 흔적이 남아 있다. 그가 젊은 시절에 썼던 쇠망치도 나란히 모셨다.

차씨의 가업은 5대째 계승을 앞뒀다. 대학 회화과 졸업을 앞둔 아들 동은(25)씨가 돕고 있기 때문이다. 차씨는 "쇠를 다루는 기술은 내가 가르치면 되니 창조력과 상상력을 기르도록 그림을 선택하게 했다"며 "아들도 내 뜻을 알아주니 대견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