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진 신고 '리니언시(leniency)'] 먼저 불면 면책, 담합 잡는 묘책… 기업 면죄부로 악용도

지난 12일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세탁기·평판TV·노트북PC 가격을 담합하다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국내 시장에서 이문을 몇 푼 더 남겨보겠다며 범죄를 공조한 것도 그랬지만, LG전자가 담합 사실을 공정위에 스스로 알려 과징금을 면제받았다는 것도 화제가 됐다. 담합 사실을 스스로 신고하면 과징금을 면제해 주는 '리니언시(leniency)'라는 제도 때문이다. LG전자가 삼성전자와 담합한 것을 자진 신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모두 세 번째이며, 모두 LG전자의 자진 신고로 조사가 이뤄졌다. 자칫 묻힐 수 있었던 담합 사실이 리니언시라는 제도 때문에 드러난 것이다.

◇적발하기 어려운 담합

담합의 영문명인 카르텔(Cartel)은 라틴어의 카르타(Carta)에서 유래했다. 교전국 간 휴전 문서를 의미한다. 싸움을 중단하고 공존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담합의 어원은 이처럼 고상하지만 실은 엄연한 범죄다. 생산자들이 서로 짜고 가격을 인상시킴으로써 소비자에게 경제적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정위는 담합이 적발되면 거액의 과징금을 물리는 것은 물론 사안이 심각할 경우 검찰에 고발해 형사상 처벌까지 받게 한다.

그런데 담합은 적발하기 무척 어렵다. 워낙 교묘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적발돼 총 3653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된 16개 생명보험사의 이자율 담합의 경우 금융당국이 업계 의견을 듣기 위해 소집한 회의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별도 회의를 소집하면 의심을 살 수 있으니 정부가 마련한 회의 자리에서 범죄를 공모한 것이다.

송상민 공정위 카르텔총괄과장은 "기업들의 행위가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며 "최근에는 IT 기술 발달로 직접 만나지 않고도 합의가 가능해 적발이 무척 어렵다"고 말했다.

◇리니언시 도입 이후 담합 적발 급증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카르텔 적발 건수가 급증하고 있다. 담합을 밝혀내기 무척 어려워졌는데 적발 건수는 오히려 크게 늘어난 것이다. 왜 그럴까? 리니언시 제도의 덕이 크다는 설명이다. 영어 '리니언시(leniency)'는 '관용'이란 뜻을 갖고 있으며, 천주교의 '고해성사'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이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죄를 사해주는 것이다.

경제학적으로는 게임이론의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이론을 활용한 것이기도 하다. 죄수의 딜레마란 경찰이 함께 범죄를 저지른 공범자들을 한 사람씩 불러 "범죄 사실을 시인하면 처벌을 면제해 주겠지만, 혼자 부인하면 가중 처벌을 받게 된다"고 얘기하면, 가중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모든 범죄자가 범죄를 시인한다는 이론이다. 범죄자들에게 최적의 상황은 공범자 모두가 부인해 무죄 방면되는 것이지만, 다른 공범자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결국 자신들에게 최악의 상태로 결론나고 만다는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 이론 활용한 리니언시

리니언시 제도는 담합에 공모한 기업들을 죄수의 딜레마 상태로 빠트린다. 다른 기업이 언제 자진 신고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서로 앞다퉈 자진 신고를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제도는 1997년 국내에 도입됐고, 2005년부터 활성화됐다.제도 도입 초기엔 기업 입장에서 메리트가 적어 활성화되지 않았다. 당시 공정위는 과징금을 어떻게 깎을지를 사안별로 결정해 자의성이 컸다. 기업들은 자진신고를 해도 과징금을 얼마나 감면받을 수 있는지 예측할 수 없었기에 별로 활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5년 들어 1순위로 자진 신고한 기업에는 과징금을 전액 감면해 주고, 2순위로 자진신고한 기업은 50% 감면해주는 내용으로 법이 개정됐다. 과징금 감면 비율이 확실해지자 자진신고가 급증했다. 공정위가 출범한 1970년 이후 2010년까지 처리된 350건의 담합 사건 가운데, 2005년 이후 처리된 것이 절반이 넘는 190건에 달한다.

송상민 과장은 "죄가 묻히는 것보다는 고해성사를 통해 밝혀지는 것이 낫고, 이게 앞으로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연결된다면 제도 도입의 이유는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리니언시가 무서워 기업들이 아예 담합하지 못하도록 예방의 기능까지 갖는다는 것이다.

◇담합 주도 기업만 빠져나가는 부작용

그러나 최근 들어 리니언시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다. 대기업들이 담합을 하고도 리니언시 제도를 악용해 돈 한 푼 안 내고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유원일 창조한국당 의원은 "현 정부 들어 74건의 담합이 리니언시를 통해 드러났는데, 이 중 58%인 42건은 담합을 주도한 대기업이 자진 신고를 통해 과징금을 면제받았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0월 16개 보험사 담합의 경우 담합을 주도했지만 1순위로 신고한 교보생명이 과징금을 내지 않았다. 담합을 상습적으로 반복한 기업이 과징금을 면제받는 것도 문제로 지적돼 왔다. 이에 따라 리니언시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하지만 권오승 서울대 교수(전 공정거래위원장)는 "사안을 길게 봐야 한다"며 "은밀하게 이뤄지는 담합을 밝혀내고 소비자 피해를 예방하려면 리니언시 제도는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2010년 기준 과징금이 부과된 담합 처리 사건 가운데 68%가 리니언시에 의한 것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리니언시가 사라지면 담합 적발은 급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기업의 밀고에 의한 적발 위험이 줄면 기업들이 마음 놓고 담합에 나설 수도 있다.

권 교수는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리니언시 제도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해 담합을 상습 반복한 기업의 자진 신고 혜택을 줄였다. 자진 신고 뒤 5년 안에 다른 담합을 자진 신고하더라도 과징금을 감면받을 수 없도록 한 것이다.

배영식 한나라당 의원은 "담합을 주도한 기업은 1순위로 자진 신고를 했더라도 과징금을 전액 깎아주지 않고 일부만 감면해 주는 식으로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