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오래된 땅과의 만남

오래된 시간을 만나는 것은 늘 많은 자극을 주고 깊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나는 건축가라는 직업이 가진 장점 중 하나가 많은 땅과 이야기를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방출장을 가게 되면 가급적 시간을 내어 근처에 있는 옛집이나 오래된 유적이 있는 곳을 들르곤 한다.

지난주 경남 의령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그날도 예외 없이 오래된 장소를 몇 군데 들렀다. 한 곳은 조선시대의 큰 학자 남명 조식 선생이 50대를 보냈던 집 '뇌룡정'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곽재우, 정인홍 등의 제자를 키우고 얼음이 꽝꽝 언 천길 폭포처럼 준엄하고 미려한 '단성현감 사직소'를 써서 명종 임금에게 올렸다. 그 집은 남명의 독특한 건축관과 자연관을 보여주어 기대했던 만큼의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또 한 군데는 별다른 사전정보 없이 들렀던, 통일 신라 말기에 존재했었다는 대동사 절터였다. 그곳은 의령에서 합천 쪽으로 고개를 넘고 시골길을 한참 타고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도착한 절터에는 얼굴과 몸의 조각들이 세월에 거의 지워진 채 단정히 앉아 있는 사람 크기의 불상 한 구와, 미려한 비례와 조각이 남아 있는 석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수령이 천 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가 오래된 친구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그 돌 조각들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나는 천 년의 시간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마치 내 앞에 커다란 백지를 한 장 펴주고 마음대로 그려보라는 듯했다. 나의 상상은 금세 커다란 백지를 다 채웠다. 예전에 부처가 앉았던 집과 그 앞을 밝혀주던 화사한 석등과 석탑, 연방 머리를 조아리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그려졌다.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 텅 빈 벌판에서 나는 흥건히 괴어 있는 시간과 따뜻하게 내리쬐는 겨울 햇살 아래서 눈을 가늘게 뜨고 나에게 들려주는 땅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한한 행복을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