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 위기 덕분?… 한국기업 채권 발행 황금기

동국제강은 최근 브라질 제철소 건설사업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4%대 금리로 3000억원의 회사채를 발행할 계획을 세웠다. 지난 10일 증권사들을 통해 채권 수요를 조사했는데, 시장의 반응이 예상보다 훨씬 뜨거워 회사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연기금·보험·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가들이 앞다퉈 채권을 사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동국제강은 채권 발행금액을 4700억원으로 늘려서 26일 발행하기로 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회사채 발행 금리가 은행 대출 금리보다 싼 데다, 투자자들의 반응도 좋아 발행량을 더 늘리기로 했다"고 말했다.

요즘 채권시장에 활력이 넘치고 있다. 세계경제에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투자자들 사이에 안전자산인 채권이 인기를 끌고 있다. 채권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발행 금리가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덕분에 기업들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것보다 회사채를 발행하는 것이 더 유리하게 됐다. 게다가 최근 기업들은 위기에 대비해 현금을 미리 확보해 두려는 목적에서 채권 발행을 더 늘리고 있다. 채권 수요와 공급 톱니바퀴가 척척 맞아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20년 만기 채권까지 발행

지난해 12월 KT는 20년 만기 채권 1600억원어치를 발행하는 데 성공해 금융계에서 화제가 됐다. 민간 기업이 만기가 20년짜리 채권을 발행한 것은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통상 국내 기업들은 3년~5년 만기로 채권을 발행해야 투자금을 유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엔 만기가 긴 회사채 발행이 잇따라 성사되고 있다. 저금리 기조가 계속되면서 연기금·보험 같은 기관투자가들이 장기 채권을 사려는 수요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강성부 동양증권 팀장은 "인구 고령화로 연기금·보험에 유입되는 자금이 해마다 10% 이상 늘고 있다"며 "국고채가 워낙 인기가 많아 금리가 크게 떨어지자 금리가 상대적으로 더 높은 회사채 장기물로 투자금이 옮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오는 27일에는 AA등급인 현대제철이 7년 만기 채권을 1200억원 발행할 계획이다. 장윤영 대우증권 차장은 "AA등급으로 7년물 발행에 성공한 기업은 최근 2년간 없었다"고 말했다. 작년 12월 AA+등급인 포스코파워가 10년물 800억원 발행에 성공한 것도 이례적인 사례로 꼽힌다.

현재 회사채(AA-등급) 금리는 연 4.2%(18일 기준)로 역대 최저 수준(2004년 3.7%)에 근접해 있다. 2008년 평균 7.4%에서 2009년 5.9%, 2010년 4.6%, 2011년 4.5%대로 계속 떨어져 왔다. 회사채 발행금액은 2009년과 2010년만 해도 50조원대이던 것이 작년엔 72조원대로 급증했다.

◇해외에서도 대접 달라진 한국 채권

해외에서도 우리 기업들이 발행한 회사채에 대한 대접이 달라지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는 10억달러(1조1400억원) 규모의 5년 만기 채권을 미국 현지에서 발행하기로 했다. 이렇게 대규모 채권을 해외에서 발행하는 것은 1997년 이후 처음이다.

KT 역시 오는 20일 3억5000만달러 규모의 회사채를 미국에서 발행하기로 18일 확정했다. 당초 3억달러를 발행할 예정이었으나, 예상보다 투자자들의 수요가 많아 발행액을 더 늘렸다. 금리도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낮은 3.87%로 결정됐다.

KT 관계자는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이라는 이유로 저평가받는 현상)'는 사실상 사라지고 '코리아 프리미엄'이 생긴 듯한 느낌"이라고 전했다.

지난해 외화표시채권(외평채·은행채·특수채·회사채 모두 포함) 발행금액은 297억달러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전년보다 20% 늘어난 것이다. 곽석주 우리투자증권 과장은 "요즘 국제 금융시장에선 부도 위기에 처해있는 유로존 국가보다는 아시아 채권, 특히 성장세가 탄탄한 한국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고 말했다. 강성부 동양증권 팀장은 "한국의 채권시장은 아시아에서 일본, 중국 다음으로 큰 시장이고, 저금리의 일본이나 투자 규제가 심한 중국에 비해 투자 매력이 크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채권시장은 현재 1200조원 규모로 10년 만에 2배 성장했다.

작년에 중국을 비롯한 외국인은 국내 채권 7조원을 순매수했다. 중국은 2009년 이후 투자를 본격화해 한국채권 보유국 3위(10조원)에 올라섰다. 1위는 미국(16조4000억원), 2위는 룩셈부르크(13조원)이다. 그러나 전체 채권시장의 외국인 투자비중은 7%(83조원)로 아직은 높지 않은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