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은 결코 모른다, 아버지가 얼마나 큰 존재인지

"자식은 결코 부모를 모른다. 부모 마음, 부모라는 존재 크기를 끝까지 헤아리지 못하는 게 자식이다. 그럼에도 부모는 대개 자식에게 전부를 건다."

'언어의 마술사' 작가 김수현이 이번 설 명절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견뎌온 부모의 뒷모습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 보인다. 23일 밤 9시 40분부터 채널 19번 TV조선을 통해 3부 연속 방송되는 설 특집극 '아버지가 미안하다'이다. 보고 나면 명치 끝이 아리고, 눈시울이 달아오르는 것을 어쩌지 못할 정도로 감동을 선사한다.

드라마는 가족이 모처럼 모이는 설 명절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퀵 서비스 배달기사인 아버지 용만(김영철)과 엄마 순주(양희경)는 오랜만에 아들 딸 손주를 만날 생각에 설렌다. 하지만 둘째 아들(정준)은 "나 사실 불임이다"라고 털어놓고, 뒤늦게 찾아온 큰딸(신은정)은 이혼 결심을 털어놓는다. 부잣집 딸로 자란 큰며느리(박시은)는 시댁이 불편하다며 자꾸 먼저 일어날 궁리만 하고, 변호사 큰아들(이민우)은 "아버지가 회사에 나타날까 봐 솔직히 겁난다"고 말한다.

17일 김 작가를 전화로 만났다. 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고 초라한 아버지, 하지만 알고 보면 누구보다 커다란 아버지를 그리려 했다."

―제목이 '아버지가 미안하다'인데, 보고 나면 '아버지 제가 미안합니다'라고 말하게 될 것 같다.

"그렇게 봐주면 좋고. 드라마 속 아버지(김영철)는 평생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퀵 서비스 배달 일을 하며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킨다. 자식들은 그런데도 아버지를 부끄러워한다. 자식이란 결코 부모를 모르는 존재라서 그렇다."

―드라마 속 네 자식은 패륜아도 범죄자도 아니다. 불임 걱정하고, 바람피우는 남편 때문에 이혼 결심하고, 마누라 눈치 보느라 부모님께 소홀한, 그냥 우리 주변 사람 모습이다.

"드라마 속 자식을 유난히 싸가지 없거나 되바라진 사람으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 지극히 있을 법하게, 당연히 그럴 법하게, '나도 사실은 저런 사람인데'라고 느낄 수 있도록 썼다."

―김 작가 작품엔 항상 자애롭고 현명한 아버지가 등장한다. 사리 판단이 분명하고 말을 아낄 줄 알고 자식을 보듬을 줄 아는 아버지….

"원래 반듯한 사람을 좋아한다. 특집극이라서 지나치게 비틀린 인물을 넣기엔 어려웠던 것도 있다. 하지만 본래 그런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고 믿는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다워야 한다고."

―아버지를 맡은 김영철씨와 어머니 양희경씨의 연기가 기대된다. 캐스팅 기준이 따로 있었는지.

"보통 대본을 쓰다 보면 머릿속에 저절로 어울릴 법한 배우가 떠오른다. 그리고 대개 그 배우를 그대로 캐스팅한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싸우고 갈등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집안일을 한다. 나물 다듬고, 전 부치고, 밤 깎고, 방석 정리하고, 방을 닦는다. 전화기 벨 소리 음악 종류, 양푼 그릇 크기까지 정확하게 적혀 있을 정도로 지문도 치밀하다. 이런 부분에 특별히 공을 들이는 이유가 있나.

"그런 걸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 드라마는 빈 껍데기 아닌가. 실제로 우린 다 그렇게 산다. 싸우면서도 밥하고 식탁 차렸다 치우고 식혜 떠놓고 물그릇 비우고. 그 모습을 세세하게 살리는 데 신경 쓰지 않고 대사와 설정만 있다면, 그건 가짜다."

―최근 다른 작가 작품 중 관심 있게 본 드라마가 있는지.

"요즘 드라마를 거의 안 본다. TV 속 화면에서 거슬리는 게 보이면 바로 돌린다. 왜 거슬리는지는 그때그때 달라서 설명하기 어렵고.(웃음) KBS 2TV 아침드라마 '복희 누나'는 가끔 본다. 대사가 탄탄해 작가의 내공이 느껴진다."

―신생 방송사들의 개국 초 시청률이 그리 성공적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드라마를 내보내는 게 부담되진 않나.

"전혀. 난 시청률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쓰고 싶은 걸 쓴다.(시청자들이) 봐주면 좋고 아니면 아닌 거다."

―이번 설 명절은 어떻게 보낼 생각인지. 다음 작품 계획이 혹시 있나.

"아직 생각 없다. 집에 틀어박혀서 무작정 쉴 거다. 책도 좀 읽고. 예전엔 퀼트도 하고 골프도 쳤는데, 이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게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