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살 그 소녀가 조선의 왕을 울렸노라

기자와 마주앉은 소녀는 처음엔 무척이나 멋쩍은 표정이었다. "털털한 성격인데, 낯을 좀 가리는 게 문제"라고 했다. 수줍어하는 모습이 드라마 속 '연우'랑 비슷한 건가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술술 말을 쏟아놓기 시작하더니, 종국엔 콧노래를 부르며 혼자 뱅글뱅글 춤까지 췄다.

이 영락없는 '소녀'가 수많은 시청자들을 울리고 있다. 데뷔 8년차의 '중견' 아역 탤런트 김유정(13). 방송 5회 만에 시청률 20%대 중반을 기록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이하 해품달)의 어린 세자빈 '연우'를 연기, '명품 아역'이라는 찬사를 한몸에 받고 있다.

19일 오후 서울 강남 한 카페에서 김유정을 만났다. 이날은 '해품달'의 아역배우 촬영분이 마지막 방송되는 날. 다음 주부터는 김수현·한가인 등 성인 연기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김유정은 "오늘 새벽까지 촬영했다"면서 "회상신이 많아 앞으로도 1회에 한 번 이상 '어린 연우'와 '훤'이 등장할 것 같다"고 했다.

성인 연기자들도 힘들어하는 살인적인 촬영 스케줄이지만 피곤한 기색이 하나도 없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저는 아직 젊잖아요"라며 깔깔 웃었다. "하루에 1~2시간밖에 못 자고 끼니도 제때 못 챙겨 먹어요. 하지만 저 진짜 강철체력이거든요. 흐흐." 약간 잠긴 목소리는 "오늘 아역 분량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란다. "이상하게 저는 촬영이 끝나면 몸살이 와요. 촬영할 때는 아무리 추운 데서 떨어도 힘든 줄 모르거든요."

소설가 정은궐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해품달'은 조선시대 가상의 왕 이훤과 세자빈 연우의 사랑을 그린 로맨스 판타지 사극. 드라마는 음모에 휘말린 연우가 저주를 받아 일시적 죽음에 이르고, 훗날 무녀(巫女) '월'이 돼 훤과 재회하는 과정을 그린다. 특히 18일(5회) 방송에서는 혼례를 앞두고 출궁당한 연우가 결국 숨을 거두고 훤이 고통스러워하며 눈물을 쏟는 장면이 전파를 타면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적셨다.

그런데도 뜻밖에 김유정은 "드라마가 너무 안 슬프게 나왔다"고 했다. "실제 대본은 더 슬펐어요. 연기하는 저도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아버지(선우재덕) 품에 안겨 죽을 때 더 꾹꾹 눌러 감정을 표현했어야 했는데…." 그는 "여진구 오빠(훤 역)는 슬플 때 소리를 지르고 울기도 했지만, 연우는 그저 눈빛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했다"며 "모든 걸 억제해야 하니 나중엔 가슴에 감정이 쌓여서 힘들었다"고 했다.

김유정은 '아역 분량만 계속 나왔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시청자들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는 데 대해 "나는 여전히 부족한 게 많다"며 겸손해했다. "워낙 원작이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었고, 알콩달콩한 러브라인이 있다 보니 나도 감정몰입이 잘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극 초반에는 전에 출연했던 '구미호: 여우누이뎐'을 떠올렸다. 그때의 슬픔, 기쁨, 행복감 등을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연우 역에 몰입이 됐다"고 했다.

2004년 5살에 CF·영화로 데뷔한 그는 '일지매' '친절한 금자씨' '추격자' 등 TV·영화를 넘나들며 만만찮은 공력을 쌓은 배우다. 출연작만 30여편. 하지만 그는 "연기를 배운 적이 없다"고 했다. 그저 "엄마랑 마주 보고 대사를 연습했다"며 "작품을 하나둘 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잘하게 된 것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어른들이 자신을 많이 찾는 것 같느냐"고 물었더니, 한참을 생각하다 "매 신(scene)마다 상대방을 받쳐주려고 많은 노력을 하는 것 때문인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신의 주인공은 나일 수도 있고, 상대일 수도 있어요. 저는 제게 카메라가 오지 않아도 늘 상대방과 시선을 맞추려고 해요."

올해 3월 중학생이 되는 그는 "촬영 때문에 공부에 많이 신경 못 쓰게 될까 봐 걱정된다"면서도 "절대로 질리지 않는, 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연기가 정말 좋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