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다른 나] 詩 인터넷 사이트 운영하는 양현근(52) 금융감독원 국장

저는 금융감독원 금융투자감독국장입니다. 증권회사의 재무 건전성과 주식 매매·펀드 판매 등 영업활동이 소비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관리·감독하는 게 주 업무이지요. 직업이 그렇다 보니 저나 제 직장에 대해 "왠지 무섭고 가까이하기 어렵다"고 말씀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저는 직장과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일을 오래전부터 해오고 있습니다. 문학, 그중에서도 시(詩)를 쓰고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일입니다. 저는 1998년 계간 '창조문학'으로 등단하고 나서 세 권의 시집을 출간한 시인입니다. 작년 8월에는 서울문화재단의 지원 대상자로 선정돼 네 번째 시집을 준비 중입니다.

저는 섬진강 파란 물길이 발아래 병풍처럼 펼쳐지는 전남 곡성 산골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새벽 강(江)이 먼바다로 흘러가는 고향 풍경은 제 작품의 배경이자 힘이 되고 있지요. 그런 제가 시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고교시절 문예반에 들어가면서부터입니다. 당시 습작 활동을 하며 잠시 문학소년의 꿈을 키웠지요. 하지만 서울로 올라온 뒤 바쁜 직장생활은 창작활동에 대한 제 꿈을 어느새 멀리 떠나보냈습니다.

한국은행에 근무하던 1980년대 중반 시 창작에 대한 욕구는 딱딱한 도시생활에 지쳐 있던 제게 다시 찾아왔습니다. 한 라디오 방송국이 주최한 시 공모전에 당선된 것이 글쓰기에 대한 꿈을 다시 한 번 키워가는 계기가 되었지요. '어딘가 나의 글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구나' '글을 통하여 세상에 희망을 전파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죠. 물론 혼자서 습작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1989년부터 글쓰기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서울 명동의 직장에서 퇴근하면 곧바로 혜화동에 있는 문학아카데미로 달려갔지요. 문단원로인 박제천 시인을 사사(師事)하고, 많은 문우(文友)들과 함께 토론하고 습작하면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워갔습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등단(登壇)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 후로도 중견인 김기택 시인에게 글쓰기를 배우며 문학에 대한 눈높이를 높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1999년 금융감독원으로 자리를 옮긴 제게 2001년 가을 작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혼자서 시를 쓰고 시집을 내는 것도 의미 있지만,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문학전문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어보기로 한 것입니다. 흔히들 그러잖아요. 시가 너무 어렵다고. 어려워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그래서 저는 서정에 바탕을 둔 현대시를 널리 알리고 함께 하는 '시마을'(http:// feelpoem.com)을 열었습니다.

개설 초기에 '시마을'은 저와 시 독자들의 소통공간으로 주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하루 100여명에 불과하던 방문자 수가 입소문을 타고 수천 명으로 늘었습니다. 지금은 하루 평균 방문자 1만명, 누적방문자 5000만명이 됐고 회원들의 수많은 모임(커뮤니티)이 자생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다양하고 유익한 콘텐츠라는 평가를 받으며 청소년권장사이트로 선정되기도 했지요.

이용자가 늘면서 사이트 활용범위도 넓어졌습니다.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와서 자유롭게 글을 쓰고 발표하고 감상할 수 있는 열린 문학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지요. 저 혼자서 관리하던 사이트 운영방식도 바뀌었습니다. 요즘 저는 바쁜 업무 때문에 별로 참여하지 못하고 자원봉사자 50여명이 운영·관리해주고 있습니다. 또 매달 우수작을 선정하고 연간 최우수작을 시상하는 등 회원들의 글쓰기 참여와 바람직한 글쓰기 방향을 제시하고, 자체 문예대학을 통해 체계적인 글쓰기 교육을 실시해서 지금까지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등단해 작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바쁜 일상에 쫓기다 보니 작은 시집 하나 갖고 다니며 잠시 짬을 내서 시 한 구절 읽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저 역시 밀린 업무와 회식 등으로 채워져 버린 여유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시집 한두 권은 서류 가방에 항상 넣고 다닙니다.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시집을 꺼내어 읽으면 마음이 온 종일 촉촉해지니까요.

저는 시는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산업사회가 진행되면서 물질적으로는 넉넉해지고 풍요로워졌지만 우리는 무엇인가 늘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갖고 살지요. 그런 삶 속에서 맺힌 것을 풀고, 가슴 아픈 곳을 달래고, 틀어진 곳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시의 역할이 아닐까요. 한 편의 시가 세상을 구원해 줄 수는 없겠지만,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보온병 역할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 직업과 시라는 문학 역시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상대를 배려하고 상대방의 눈높이에서 생각한다는 점은 서로 통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