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한시 음률 맞춰 읊다보면 우리 전통의 멋에 빠져들어요"

"임술지추칠월(壬戌之秋七月) 기망(旣望)에 소자여객(蘇子與客)으로…."

지난 27일 오전 11시쯤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 한 상가주택의 거실. 옛날 서당이나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정자를 떠올리게 했다. 도포 차림에 정자관을 쓴 어르신이 좌정하고, 앞쪽에는 중년 남녀들과 20대 젊은이가 단정하게 앉았다. 몸을 가볍게 좌우로 흔들며 음률에 맞춰 소식(蘇軾)의 '전적벽부(前赤壁賦)'를 읊어 나갔다. 조선 초기 학자 권근(權近)의 '영남루시(嶺南樓詩)', 신사임당(申師任堂)의 향수시 등이 낭랑하고 그윽하게 이어졌다. 바로 이곳에서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된 송서(誦書)·율창(律唱)이 명맥을 잇고 있다.

◇스승 이윤형씨가 복원

이날 가운데에 앉아 연습을 이끄는 이는 한병옥(韓炳玉·79)씨로, 작년 12월 경기도문화재위원회로부터 송서·율창 부문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민요, 판소리, 시조, 가곡 등 다른 전통 노래에 비해 송서나 율창은 이름조차 생소하다. 그러나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우리의 전통 문화로 꼽히고 있다. 송서는 한자로 된 옛 산문을 고저장단을 넣어 읽는다. 또 율창은 한시를 음률에 맞춰 읊는다. 노래와 달리 근엄하고 깊이있는 소리를 낸다. 모두 조선시대에 서울을 중심으로 발전 계승되고 전파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동두천에서 송서·율창이 전승되고 있을까? 한씨의 스승인 이윤형(1923~2005) 선생이 전통을 되살리고 기반을 다졌기 때문이다. 한씨도 강원도 철원 출신이지만 6·25 전쟁 당시 서울로 피란을 왔다가 동두천에 정착하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던 한씨는 동두천에서 미곡상을 하면서 이웃에 살던 이씨와 왕래하게 됐다. 송서·율창은 물론 시조나 경기·서도민요 등을 두루 익혔다. 1981년에는 본격적으로 문하생으로 등록하고 전문 국악인으로 활동하며 동두천국악협회 회장도 지냈다.

송서·율창은 스승인 이씨가 2000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으나 작고하면서 해지됐고, 다시 한씨가 이어가고 있다. 6남매가 모두 출가하고 한씨가 혼자 살고 있는 살림집에는 매주 목요일 오후마다 제자들이 모인다. 이곳이 송서·율창 보존회 사무실 겸 무형문화재 전수소 역할을 한다. 두 시간 남짓 목청과 호흡을 가다듬으며 옛글을 낭송한다. 보통 10여명이 모이고, 매달 한번은 수원 등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는 제자들도 자리를 함께한다.

◇다양한 제자들이 이수

제자들의 면면도 다양하다. 스승 이윤형 선생의 딸 이은옥(57)씨도 있다. 이씨는 "어릴 적 아버지의 노래를 곁에서 듣기는 했으나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10년 정도"라며 "점점 더 우리 전통의 멋에 빠져들게 됐다"고 말했다. 일본 나고야대 법학연구소 교수인 김광석(51)씨도 눈길을 끈다. 2008년 용인에서 가진 한·일 전통음악인들의 교류 음악회를 주선한 것을 계기로 송서·율창에 눈을 돌리게 됐다. 그는 "일본에서 17년을 살았지만 우리의 옛것을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 매년 방학마다 찾아와서 배운다"고 했다.

또 송서·율창 보존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박종순(50)씨는 든든한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전문 국악인이다. 국악예고, 이화여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12가사'를 이수했다. 용인대에서 정가(正歌)를 전공하고 있는 아들 심종유(20)씨도 함께 송서·율창을 배운다. 박씨는 "이제 글 읽는 풍경과 소리는 TV의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됐다"며 "지루하다고 여기기 쉽지만 낭송을 하는 동안에 몸과 마음에 꾸준히 에너지가 흐르고 스트레스 해소에 그만"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호흡이 중요하기 때문에 심신 안정이나 정서 순화에 도움이 된다고 소개했다.

한씨와 송서·율창 보존회 식구들은 대외 활동에도 열심이다. 지난 2007년에는 인도의 뉴델리에서 '인도-코리아 전통예술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특히 율창은 성가처럼 같은 음률이 반복되기 때문에 명상음악과 유사한 특징이 있어 인도에서도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한자나 한문을 바탕으로 하지만, 음률이 있어 쉽게 배울 수 있기 때문에 학교에도 보급에 나서고 있다. 한씨는 "요즘은 오직 흔들어대는 외래 대중문화가 판을 치고 있지만, 우리의 옛것도 분명 좋은 것이 많다"며 "빨리 후계자를 양성하고 전승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