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겨울나기 돕는 게 제 보람입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2동 '아가페 21 지역아동센터'. 어린이들은 매년 냄새 나는 석유난로 하나로 겨울을 났다. 15평 남짓한 공간을 덥혀주는 유일한 난방기구였다. 난로 근처의 아이들은 뜨겁다고 난리였고, 좀 떨어진 자리에서는 춥다며 볼멘 소리가 나왔다. 점퍼에 불이 붙어 혼비백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올겨울 어린이들은 석유 보일러를 갖고 나타난 산타클로스를 만났다.

◇난방 분야 전문 연구

지난달 27일,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인 이태원(53) 박사가 아동센터에서 다른 자원봉사자들에게 석유 보일러를 설치할 위치와 실내 온풍기가 배치될 벽면을 일러주고 있었다. 이 신형 난방시설의 모든 설비와 자재는 이 박사가 국가녹색기술대상 국토해양부 장관상을 수상하며 받은 상금 500만원을 바탕으로 마련했다.

이 박사의 기부 덕분에 낡은 난방시설 때문에 불편과 불안을 안고 살던 지역아동센터 두 곳과 독거 어르신 세대 한 곳이 따뜻한 겨울을 나게 됐다. 특히 새로 설치된 난방 시스템은 이 박사의 연구 노하우가 담긴 제품이어서 더욱 뜻이 깊었다. 실외 석유 보일러에서 온수를 만들면 온수가 실내 온풍기에 이르러 따뜻한 바람으로 바뀌어 나오는 방식이다.

이 박사는 한국건설기술연구원 공공건축연구본부에서 '그린 빌딩'을 연구한다. 우리 전통 문화인 바닥 난방을 기반으로, 최소의 에너지로 가장 싸고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주요 연구 대상이다. 국가녹색기술대상에서 수상한 공적도 '계량정보를 이용한 난방 에너지 제어와 관리 기술'이다. 그는 "바닥 난방은 외국에서 한국어 통역관 데리고 와서 배워가야 할 수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있는 고양의 지역사회에서 이 박사는 다른 얼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연구실을 벗어나면 기부와 봉사에 남다른 열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2009년에는 고양시 자원봉사센터에 1년간 1000만원이 넘게 기부해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불규칙하게 들어오는 수입을 꾸준히 기부하고, 주말이나 명절 연휴에는 봉사에 나선다.

◇기부와 봉사도 열성

이 박사의 기부와 봉사는 13년 전에 시작됐다. 가끔 통장으로 월급 외에 난방기술 자문료와 기술 이전료 등이 들어왔다. 어떻게 하면 보람 있게 쓸 수 있을지 궁리한 끝에 고양시 자원봉사센터를 찾아가 기부금으로 냈다. 돌아서는 그를 직원들이 "오신 김에 한번 가보자"며 이끌었다.

그래서 찾아간 장애인 복지시설 '천사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첫 인연을 텄다. 그가 실제로 열악한 복지시설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뒤로 매월 셋째 주 화요일에는 치킨, 김밥, 피자를 양손 가득 들고 방문한다. 그는 "돈이란 것이 수중에 있다가도 금세 사라지는 것인데, 기부를 하면 더 큰 가치를 발휘하며 쓰이지 않느냐"고 말했다.

또 '재능 기부'로 이어졌다. 이 박사는 "겨울 난방비로 매월 250만원 정도를 지출하는 것을 알게 돼 살펴보니 석유 보일러에서 기름이 새고, 온수가 너무 뜨겁게 나오고 있었다"고 했다. 보일러 시설을 바꾸고, 온수 온도를 조절하는 장치를 달았더니 기름값이 절반으로 줄었다. 그때부터 다른 복지시설의 난방 문제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토요일 아침에 집을 나와 다른 길로 가면 정말 기분이 좋아요. 만나는 사람, 나누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죠. '어떻게 하면 이기나' 하는 경쟁사회인데, 서로가 더 챙겨주고 좋은 말 많이 해 주려고 합니다. 주말에 열심히 봉사하고, 월요일에 출근하면 오히려 일이 더 잘 됩니다." 이 박사는 "자원봉사는 남을 돕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정화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원봉사가 생활화되면 개인의 보람을 넘어 복지사회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고 했다. 또 "무조건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보다, 상대방 처지에서 모든 걸 판단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작은 것이라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날 오후 이 박사는 아가페 21 지역아동센터에 잠깐 들렀다. 새 난방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한 뒤 "세미나에 늦겠다"며 겨울 햇살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