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내 친구의 詩

따스할 것만 같은 햇살이 가득한데 바람은 왜 그렇게 차가운지…. 그렇게 차가운 바람이 휘감는 산 언덕 한편 석곽 속에 별안간 한 줌의 재로 변한 친구를 남겨두고 돌아왔다. 갑자기 쓰러져 뇌경색으로 수술, 입원해 있는 열흘간 친구가 세상을 떠나리라는 생각은 단 한순간도 해보지 않았다. 우리 의료기술도 믿을 만했지만, 무엇보다 강한 의지를 가진 친구였다. 열흘째 되는 날의 한밤중, 친구 부인이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이상철씨 갔어요."

친구가 갔단다. 46년 동안 '친구'라는 단어마저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하던 친구. 고교시절 이후 어느 집단에 있으나 두각을 나타내 전설을 남긴 친구. 신문사에서 잔뼈가 굵어 편집국장과 월간지 사장을 지내고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내기도 한 친구. 수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고, 그럴 수 없는 사람에겐 다른 무엇으로라도 보상을 하려고 했던 가슴 따뜻한 친구. 언제나 재치와 유머로 좌중을 이끄는 친구. 그 친구가 갔단다.

그래도 믿기지 않았다. "설마, 잠시 안 좋은 상태에 빠졌겠지" 하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길, 문득 고통스러워하던 친구의 모습이 떠오른다. 3년여 전 누명을 쓰고 긴 재판이 끝날 때까지, "죽고 싶어도 불명예를 안고 죽을 수는 없다"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던 친구의 얼굴. 재판이 끝나고 누명을 벗자 친구는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정동진의 티 없는 백사장에 서더니 어린애같이 해맑은 얼굴이 됐다. 눈이 시린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옥색 바다를 향해 기지개를 켜던 그의 눈에선 어느새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믿기지 않고,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은 실제일 경우가 더 많은가 보다. 친구는 정말 그렇게 덧없이 가버렸고, 친구를 찬바람 부는 산언덕에 남겨두고 돌아왔다. 의자에 안기듯 털썩 앉아 이렇게 홀로 있으니 마치 '장례식' 영화 한 편 보고 온 느낌이다. '친구, 무엇이 그리 급해 이렇게 황망히 가버렸나.'

문득 자기가 지은 시(詩)라고 하면서 뜬금없이 보여주던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산마루 꺾어 돌며 마을 길 내려보네/ 저런, 수십 년 오솔길 저렇게 짧았던가/ 강물처럼 휘어휘어 왔어도 될 길/ 왜 말처럼 앞만 보며 달려왔던가/ 가족들 내 곁에 둘러서 흐느끼네/ 그 모습에 발걸음 무거워질까나 황급히 길 나섰소/(…)모두가 아름다웠어/ 모든 것이 행복이었어/ 미움과 다툼, 분노조차 사랑이었어(…)그 누구도, 그 무엇도 품을 수 있어/ 난 이제 하늘이야, 하늘을 가는 구름이야 /끝없이 흘러가는 바람이야/ 모두들 잘 있게.' (돌아가는 길)

시를 쓴 날짜는 2011년 1월 23일, 숨을 거두기 꼭 1년 전이다. 친구에게 "왜 이런 시를 썼느냐"고 역정 섞인 말투로 물었다. 친구는 그저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리며 그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오히려 태클을 걸었다. "술도 못 마시는 네 놈이 이해할 수 있겠느냐마는 여기 우리네 인생이 있다"면서 그의 익살만큼이나 재미있는 시를 또 보여줬다.

'소주와 맥주가 온몸을 섞어/ 태어나는 너/ 소주가 맥주 속 깊은 곳에 진액을 투하해/ 너는 잉태된다(…)너는 세상에 많은 선행을 베풀어 가문을 빛내왔다/ 가난한 술꾼들에겐/ 값싸고 신속하게 취기를 직송해/ 삶에 찌든 피로와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보냈다(…)그뿐이랴/ 너는 풀죽은 샐러리맨들의 기를 살린 일등공신이었다/ 너 아니면 그들이 어떻게 만당의 박수를 받아 보겠는가(…).'(소주폭탄 예찬)

그리고 달포 후쯤, 차 안에서 아이폰을 넘겨주며 또 하나의 시를 읽어보라고 한다. 그 며칠 전 쓴 시 '어머니'라고 했다.

'꽃도 채 피지 않은 봄날이었지요/ 그날은/ 바람도 없는 흐린 날이었지요/ 그날은/ 고달팠던 삶들/ 행복했던 기억들/ 어슴푸레 눈가로 흘리시며/ 잠자듯 떠나셨지요/ 어머니는/ 화려한 것 소란한 것/ 싫어하시던 성품 그대로/ 하얀 치마저고리에 고무신만 신고/ 꿈꾸듯 그렇게 걸어가셨지요(…)눈 감으면/ 말없이 바라만 보시는 당신 모습에/ 뒤척이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그날은,/ 꽃도 피지 않고/ 바람도 멈춰 섰던 그날은/ 날마다 멀어지지만/ 당신은/ 날마다 저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날마다 제가 다가가고 있습니다/ 보이시지요, 어머니.'

시를 읽으며 내 어머니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지면서도 친구가 정말 자신의 어머니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시가 암시하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친구의 불행을 막지 못한 내 미련함에 자꾸만 죄책감이 스며든다.

친구는 제법 많은 시를 쓰고 있었다. 일이 바빠 떠오르는 시상(詩想)을 정리할 수 없었던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고 했다. 새로 쓴 시를 보여주며 어린애 같은 미소를 띠던 친구 얼굴이 생각난다. 보고 싶다. 시집이라도 묶어 책상머리에 두면 그리움이 덜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