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상 서랍 참 희한하네

TV 화면 가득 책상 하나가 클로즈업된다. 각각 서랍이 달린 나무 상자 4개가 책상 상판에 붙어 있고, 상판 자체에도 2개의 서랍이 있다. 리포터가 서랍 하나를 열었다가 힘차게 닫자 마술같이 나머지 서랍 5개가 휙 열린다. 이번엔 리포터가 서랍을 살포시 닫아 본다. 아까는 열렸던 서랍들이 꼼짝 않는다. 작품명 '리슨 투 유어 핸즈(Listen to your hands·당신의 손에 귀 기울여 봐요)'. 이름처럼 서랍들이 손의 힘을 감지해 반응하는 것 같다.

이 장면은 지난달 중순 독일 방송사 ZDF와 RTL에 나란히 등장했다. 리포터는 달랐지만 두 사람의 놀라운 반응은 비슷했다. 작품을 만든 사람은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디자이너 이상혁(29)씨였다. 그는 이 작품으로 지난달 16~22일 독일 쾰른에서 열린 '2012 쾰른 국제 가구박람회(IMM cologne)'의 'D³ 콘테스트'에서 2등을 차지했다. 쾰른 박람회는 밀라노와 함께 유럽의 양대 가구박람회로 불린다. 'D³ 콘테스트'는 독일디자인협회가 이 기간에 전 세계 신인 디자이너들을 대상으로 여는 공모전으로, 유명 디자이너가 되는 관문 중 하나로 여겨진다. 올해는 600여 명이 참여해 28개 팀이 본선에 올랐고 3등까지 시상했다.

"모든 게 빨리빨리 돌아가는 세상이잖아요. 천천히 가구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주고 싶었어요. 손에 귀 기울여보라는 뜻의 이름에도 그런 의미를 담았고요." 8일 국제전화로 만난 이씨는 이 작품의 주제를 '느림의 미학'이라고 했다. 이씨는 한국 한 대학에서 산업디자인과에 다니다 중퇴하고 네덜란드로 건너가 디자인 아카데미 에인트호번에서 유학한 뒤 독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책상 안에 자동 장치 같은 게 숨어 있는 건 아닐까. "기계적 장치는 전혀 없어요. 완전한 아날로그랍니다." 그는 '마술'의 비밀을 조금씩 풀어냈다. "서랍 사이가 진공으로 돼 있어요. 서랍 하나를 활짝 열었다 빠르게 닫으면 다른 서랍들이 압축된 공기에 의해서 열리게 되죠. 천천히 닫으면 공기가 서랍들 틈 사이에 있는 작은 구멍으로 조금씩 들어가기 때문에 이런 힘이 없어지는 것이고요." 이씨는 "사람이 촉각을 통해 사물과 서로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디자인을 통한 사람과 사물의 소통'은 다른 작품에서도 엿보인다. '조이 오브 쿠킹 투게더(Joy of Cooking Together·함께 요리하는 기쁨)'라는 이름의 시리즈는 각양각색의 조리 도구가 저마다 소리를 지닌 타악기 역할을 겸하도록 디자인했다. 예컨대 나무 뒤집개는 홈을 여러 개 내 빨래판처럼 만들어 프라이팬 끝 부분에 대고 비비면 소리가 나게 했다. 냄비 뚜껑은 심벌즈 모양이다. 샐러드 집게는 캐스터네츠 형태로 만들어 집을 때마다 딱딱 소리가 난다. 도마는 나무 사이에 크기가 다른 홈을 몇 개 내 칼질하는 위치에 따라 소리가 다르게 나도록 했다. 이씨는 "한국 여인들이 함께 모여 흥얼거리면서 음식을 함께 만드는 장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그는 "개인적 경험에서 힌트를 자주 얻는 편"이라고도 했다. '미체어(Mechair)'를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이 의자는 좌판만 수평일 뿐 팔걸이와 다리가 비대칭이다. "한쪽으로 기대앉는 습관이 있는데 이걸 디자인으로 풀어봤어요. 사람마다 안락함을 느끼는 자세가 다르겠죠. 자신에게 익숙한 자세를 취하게 하는 가구가 결국 가장 편안한 가구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씨의 작품은 조만간 서울에서 볼 수 있을 예정이다. 그는 "현재 한 국내 대학 미술관에서 전시를 준비 중"이라며 "아날로그 방식으로 가구에 생각을 불어넣는 작업을 한국에서도 자주 선보이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