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들 말하는 공감·위로… 난 참 어렵더라

작가 김연수(42)가 9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으로 들어섰다. 1층 현관을 통과하면 왼쪽 벽면에 스위스 출신 화가 외젠느 베르낭(Bernand)의 '부활 아침,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요한'의 복제화가 보인다. 지난해 가을 이곳에서 처음 알게 된 뒤, 반복해서 찾았던 작품이다. 새 장편소설의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끙끙거리던 작가에게 '부활 아침…'은 구원의 손길을 뻗었고, 4년 만의 장편 '원더보이'(문학동네 출간)는 그렇게 빛을 봤다. 새벽을 향해 달려가던 베드로와 요한뿐만 아니라, 소설 속 희선과 주인공 원더보이에게도 구원의 빛을 내린 것이다.

1993년 등단 이후, 김연수는 마치 "당신이 쓰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권위 있는 상들을 받아온 작가였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와 동인문학상(2003), '나는 유령작가입니다'(2005)와 대산문학상, '달로 간 코미디언'과 황순원 문학상(2007),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과 이상문학상(2009)이 그 대강의 목록이다. 그러던 작가가 2008년 이후 '슬럼프'에 빠졌다. 육체의 나이로는 30대 후반에서 40대를 넘어서던 시기. 2008년부터 청소년 잡지 '풋'에 연재하던 '원더보이'도 그 시기에 중단했던 작품이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겪었고, 무기력에 빠졌고, 글을 쓰면서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원더보이'는 그런 점에서 독자뿐만 아니라 작가 본인에게도 예외적 의미가 있는 작품. 그는 '단절'이란 표현을 썼다. 비유하자면 그 단절이라는 다리의 양편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 스스로에게 말걸기와 타인에게 말걸기의 세계, 그리고 홀로 걷는 인생과 연결고리이자 책무로서의 인생 말이다. 그 책무는 아버지 세대와 자식 세대를 이어주는 역할이다. 평론가 해설은 물론, 작가의 말 한마디 없는 이 장편 소설에는 유일하게 '열세 살, 열무에게'라는, 단 한 줄이 적혀 있다. 열무는 오는 3월에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작가의 무남독녀 애칭이다.

만화영화처럼 신나는 제목의 이 장편은 여러 겹으로 읽을 수 있다. 수면 위에는 희화화된 80년대가 우화(寓話)로 찰랑거리고, 수면 밑으로는 암울했던 당시의 광주와 철거민과 분신 정국의 역사가 납처럼 무겁게 가라앉는다. 주인공은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은 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을 지니게 된 소년 정훈. 이 비극의 소년을 '원더보이'로 띄운 게 권 대령이다. 소위 '조국'을 위해 일하는 권 대령은 이 교통사고에 '스토리'를 만들었고, 정훈의 아버지는 암약하던 간첩을 살신성인하며 자신의 일톤 트럭으로 때려잡은 구국의 영웅이 된다. 만화 같은 상상력으로 경쾌하게 질주하던 '원더보이'가 수면 밑으로 잠수하는 건 강토라는 이름으로 선머슴처럼 위장하고 다니는 여대생 희선을 만나면서부터. 희선의 세계는 푸르디푸른 만화가 아니라 먹빛 현실의 세계다.

연정을 품게 되면서 다른 사람과 공감하는 초능력을 잃어버리는 정훈을 알레고리로, 작가는 진정한 소통과 공감의 의미를 묻는다. 이 발랄한 우화적 구도와 80년대를 전달하겠다는 작가적 소명의식 사이에 논리적 정합성과 개연성이 확보됐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겠지만, 상상력의 밀도나 지적유희의 경쾌함만큼은 '역시 김연수'임을 재삼 확인하게 만들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공감과 위로가 마치 시대의 화두가 된 것 같은 요즘, 작가는 "공감할 수 없다는 한계를 깨닫는 순간부터 작가는 시작한다"고 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써보겠다고 하는 순간, 자신의 한계에 대해 절감하게 된다는 것. 그래서 섣불리 공감과 위로를 말하는 사람들이 그에게는 경이롭다. 작가는 바로 그 한계에서 시작하고, 또 장렬하게 실패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명동 성당의 '부활 아침…'에서 베드로의 얼굴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도 예수의 묘지를 향해 열심히 달려간다. '원더보이'를 김연수의 대표작으로 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작가는 지금도 한결같이 달려간다. 등단 이후 19년 동안 자타가 공인했듯, 오늘도 성실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