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12] 젖은 땅에서 신파극… 여배우, 죽는 장면을 서서 연기

판소리도 민요 공연도 옥외에서 구경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던 이 땅 백성들에게 20세기 벽두, 신천지 같은 예술 공간이 선을 보였다. 실내 '연극장(演劇場)'이다. 극장이 처음부터 문화 공간으로 대접받은 건 아니었다. 대중에겐 "번화한 우슴 소리에… 풍진 세상 모든 일을 잠시라도 잊는" 휴식처였지만(조선일보 1925년 8월 27일자), 일부 지식인은 극장을 '음담패설' 난무하는 '방탕한 남녀의 대합소(待合所)'쯤으로 여겼다.(1920년 7월 22일자 '풍화를 괴란〈壞亂〉케 하는 경성의 제 극장')

관립 극장의 효시로 꼽히는 협률사(協律社)도 1902년 탄생한 이후 기생들 예능과 활동사진 등을 선보였다가 "연극은 천한 배우들이 먹고살려고 하는 짓인데 왜 나라가 나서서 극장을 운영하는가"(황성신문 1906년 4월 19일자)라는 관리의 상소가 고종에게 제기돼 한때 공연장 기능이 정지되기도 했다. 서울 정동 새문안교회 자리의 협률사는 1908년 최초의 서양식 민간 극장인 '원각사(圓覺社)'로 재출발하며 이인직의 '은세계(銀世界)'를 공연하여 신극의 요람이 됐다.

원각사를 시발로 몇몇 민간 극장이 문 열었지만 영화관을 겸하는 곳이 많았고 연극 전문 공연장은 드물었다. 극장 신축은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경성 30만 인구가 생활하는 곳에서 오날날까지 완전한 연극장이 한 곳도 업다"는 한탄이 나올 정도였다.(1921년 8월 19일자) 신파 연극을 주도한 이기세(李基世)는 "캄캄한 야음(夜陰)에서 이 구석 저 구석을 더듬고 있는 우리의 극계… 참담하다"며 연극에 냉소적인 지식층에 섭섭함을 토로했다.(1920년 8월 25일자)

진지한 예술극으로부터 그야말로 신파조의 신파극에 이르기까지 여러 갈래 시도를 하던 1920년대의 우리 근대 연극은 맨땅에 머리를 박는 역경을 이겨내야 했다. 특히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하며 관객을 찾아나선 신파 극단의 어려움이 컸다. 1920년대에 지방에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공연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에 '짠발짠(장발장)''갓쥬샤(카추샤)'등 일본식을 답습한 신파극을 들고 전국을 돌며 숱한 백성의 눈물을 빼놓았던 대중극단 취성좌(聚星座·단장 金小浪)의 공연 기사를 보면 경성보다는 지방 공연이 훨씬 더 많다. 가령 1921년 1월 9일부터 두 달 남짓 사이에 이 극단은 인천·경성으로부터 멀리 평남 진남포 공연까지를 소화했다.(1921년 1월 9일~3월 19일자)

이 극단이 신파극 대표작 '장한몽(長恨夢)'을 지방 공연할 땐 "정각 전부터 관람자 수백명이 운집하여 장내에는 입추의 여지가 무(無)하였고" 밤 8시에 시작한 공연은 여성 관객들 흐느낌 속에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무려 5시간이나 이어졌다.(1923년 6월 17일자) 무대가 따로 없이 취성좌 배우들이 서는 곳이 무대였다. 1923년 경주 공연 때는 동네 여관 앞마당에서 '가정 정극(正劇)'을 공연했다.(1923년 6월 17일자)

유랑 신파극단 배우들 신세란 이곳저곳 떠돌던 조선 남사당패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느 여름 맨땅을 무대 삼아 지방 공연하던 취성좌가 소나기를 만났다. 땅바닥에 빗물이 흥건히 고여 진흙탕이 되자, 주연 여배우 마호정(馬豪政)은 마지막 죽는 장면에서 무대 의상이 젖을까봐 선 채로 죽는 연기를 했다. '입사(立死) 연기'라는 신조어가 이 일화에서 탄생했다.(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