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과 薄紙(박지)로… 그녀, 고려佛畵(불화)를 만나다

"200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에서 고려 시대의 명품(名品)을 소개하는 전시가 열렸어요. 그때 일본 가가미진자(鏡神寺) 소장 '수월관음도'를 처음 보고 큰 감동을 받았죠. 우리 채색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려불화가 사람들에게 잊히는 게 안타까워서, 언젠가는 고려불화와 연관된 작업을 하리라 결심했어요."

이번엔 불화(佛畵)다. 한지와 천, 전통 안료(顔料)로 우리네 여성들을 표현해 온 정종미(55)의 새로운 도전이다. 내달 10일까지 서울 팔판동 갤러리 인에서 열리는 개인전 '여성성에 바치는 헌사―보자기 부인'에는 수월관음, 아미타여래, 지장보살 등 고려 불화 도상에 한국 여성의 얼굴을 결합시킨 '오색 보살' 시리즈가 소개됐다.

'오색보살' 시리즈는 백(白)·청(靑)·적(赤)·황(黃)·흑(黑)의 오방색(五方色) 배경에 부처의 형상을 그려넣은 것. 평소 "나는 색채(色彩)로 여성을 위로하고 찬양한다"며 색동 빛깔을 즐겨 작품에 쓰곤 했던 작가의 작업철학이 이번엔 오방색으로 확장돼 반영됐다. 화려한 의복 표현을 위해 한지 중 가장 얇은 박지(薄紙)를 사용한 것도 '오색보살' 시리즈의 특징. 시리즈 중 한 점인 '백(白)―아미타여래'의 붉은 가사(袈裟)는 꼭두서니로 붉게 물들인 박지에 순금가루 섞은 풀로 금박을 그려넣고 손으로 자연스레 주름을 잡아 아미타여래의 상반신에 붙여 표현했다. "박지는 조선왕조실록을 보수할 때 사용할 만큼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재료입니다. 부처의 신성(神聖)과 여성성이 맞닿은 지점을 나타내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정종미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평소에 모든 걸 포용하는 불심(佛心)이 곧 모성(母性)과 통한다고 생각해 왔다. 여성성과 부처를 결합시킨 건 그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박지를 이용한 작업은 또 있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대형 설치작업 '조각보를 위한 진혼곡'. 49개의 조각보를 이어붙여 만든 가로 7m, 세로 7m짜리 보자기를 벽에 붙이고 20m가 넘는 오색 박지 매듭을 아래로 길게 늘어뜨렸다. "매듭처럼 맺힌 한국 여성의 한(恨)을 강물처럼 풀어주겠다는 의미"라는 것이 작가의 설명.

한지 작업을 시작한 1990년대 중반부터 정종미의 주제는 일관되게 '한국 여성의 정한(情恨)'이다. 여성성과 한맺힘을 동일시하는 이 정서가 과연 현대의 젊은 여성들에게서도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정종미는 "아마 '한'이라는 정서는 세대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같은 여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고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사실 대구의 유복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대를 나오고, 변호사 남편과 결혼한 정종미야말로 '한' 따위와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여성. 그러나 그는 "'저 여자는 남편 잘 만난 덕에 작업한다'는 주변의 편견 때문에 더 이를 악물고 작업했다. 작업의 원동력은 열정이다."고 말했다. (02)732-467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