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을 흔히 증시 최후의 보루라고 한다. 지난해 8월 유럽발 재정위기로 주가가 폭락할 때도 국민연금이 주식 매입에 나서며 구원투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 과정에서 주요 기업에 대한 국민연금의 지분율도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그런데 국민연금의 국내 증시 투자비중이 늘어나면서 규정의 덫에 빠졌다. 이른바 '10% 룰'의 덫이다. 10% 룰이란 상장기업 지분을 10% 이상 가진 주요 주주가 6개월 이내 주식을 팔아 차익을 남긴 경우 해당 기업에 돌려줘야 하고, 지분 변동이 있으면 5일 이내에 공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으로선 이 룰을 지키려면 너무 번거롭고 관련 비용도 많이 들어 유망 주식에 더 투자하고 싶어도 지분율이 9%대까지 올라가면 투자를 멈추는 실정이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지분 10%가 넘으면 주식 1주만 더 사고팔아도 공시를 해야 하는 행정비용이 발생하고, 6개월간 매매가 묶이는 등 큰 제약이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10%를 넘기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주식들은 대부분 성장 잠재력이 큰 우량주여서 국민연금의 선택 폭이 크게 제한되는 문제점이 있다.
◇우량주에 추가 투자 힘들어
'10%룰'은 10% 이상 지분을 보유한 투자자가 회사 내부 경영정보를 이용해 단기 매매 차익을 얻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됐다. 그러나 재무적 투자가인 연기금은 경영권에 접근할 수 없는 만큼, 연기금에 대해선 예외적으로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는 것이 국민연금 주장이다.
국민연금의 지분율이 이미 9%를 넘긴 상장기업은 40여개(1월 말 공시 기준)에 이른다. 현대제철, SK케미칼, 하나금융지주, 하이닉스, 만도, CJ제일제당, 호텔신라, S＆T대우, 현대건설 등 대부분 시가총액 100위 안에 드는 우량주인데, 10% 룰 때문에 투자를 더이상 늘리기 힘든 상태다. 시가총액 100위 기업이 전체 시가총액의 90%를 차지하는 것을 감안하면, 국민연금이 투자할 만한 기업 수는 크게 줄어든 상태다. 또 국민연금이 지분을 5% 이상 보유한 기업도 180여개(1월 말 공시 기준)에 달해 앞으로 10% 룰 때문에 고민해야 하는 기업 숫자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어항 속 고래… 대체 투자 늘려야
전문가들 사이에선 10% 룰을 완화할 필요가 있지만,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비중이 더 과도하게 커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국민연금의 주식 투자 비중은 작년 말 전체 주식 시가총액의 5%에 달했고, 매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국민연금은 올해 전체 운용기금 중 국내 주식 투자 비중을 작년 말 18%에서 19.3%로 좀더 늘리기로 했다. 작년 말 350조원이던 국민연금 총자산이 올해 말 400조원에 달하면, 총 77조원을 국내 주식에 담는다는 얘기다. 이는 현재 전체 시가총액(1100조원)의 7%에 달하는 금액이다.
국민연금은 2020년에는 924조원, 2043년에는 2465조원으로 급증할 전망이어서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시장에서 '어항 속 고래'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 기관의 자금이 주식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커지면, 스스로의 움직임에 의해 주가가 오르거나 떨어져 운신의 폭을 스스로 제약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세계 최대 연기금인 미국의 캘퍼스(캘리포니아 공무원 퇴직연금)도 미국 국내 주식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 미만으로, 국민연금의 몸집은 이미 유례없이 큰 상태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이 주식 이외의 대체 투자를 보다 적극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박사는 "10%룰을 완화해 투자의 자율성을 높일 필요는 있지만, 국민연금 스스로 전체 주식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조절해야 한다"며 "해외 주식, 채권, 부동산 등 다른 투자 비중을 더 적극적으로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