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로쓰기·납활자… 다시 맡고 싶었다, 그 아름다운 文香

지난 1월 22일 박완서 선생의 1주기를 기념해 출판사 열화당은 작가의 데뷔작 '나목'을 복간했다. 당시 그대로의 세로쓰기, 국한문 혼용, 판본에 따라 달라진 표현 대조표 삽입 등 요즘의 상업주의 출판을 반성하자는 취지의 500질 한정 기념판이다. 열화당은 1976년 '나목'을 처음 책으로 펴냈던 출판사. 파주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이기도 한 열화당 이기웅(72) 발행인이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박완서(朴婉緖) 선생이 세상 떠나던 날 작년 이맘때를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날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의 별세를 추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0년대에 열화당(悅話堂)은 '나목'에 이어 '창밖은 봄'을 출간했고, 내 잔뼈를 키웠던 출판사 일지사(一志社)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까지 합치면 내가 작가와 맺은 인연은 각별한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열화당은 미술 출판에 매진하게 되고, 출판을 통한 그와의 인연은 차츰 멀어져 갔다.

그런 지경에서 갑자기 그의 부음을 접하는 순간 현세에 남은 나는 박완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일종의 허탈과 자괴 같은 울분이 뜬금없이 찾아들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나는 '나목'을 새로 찍는 편집에 착수했다. 일종의 추억의 출판여행이랄까. 기획하는 시간이 꽤 걸렸다. 젊은 편집자들을 이해시키는 일도 편치 않았다. 그동안 우리 문학 출판이 소홀히 했던 '책의 원칙과 가치'를 반성하는 형식을 찾는 일이 기획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책의 외형에 드러난 요소들을 통해 기억을 살리거나 지향하는 바 가치를 실현해내는 기교가 중요했다.

우리 시대 출판 편집에서 무자비하게 버린 '세로쓰기' '납활자' '한자(漢字)의 병기(倂記)' 등이 에디토리얼 디자인의 복원 대상이었다. 그러나 납활자의 복원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나마 그 기능을 유존시키려는 노력으로 파주출판도시 안에 활판 공방을 간신히 마련해 놓고는 있으나, 활자 갖춤이 턱없이 부족하며 인쇄 사정도 허락하지 않으므로, 포기했다.

세로쓰기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물론 전용 서체가 전무할 정도였지만, 옛 맛을 살리기 위해 이런저런 궁리를 기울였다. 한글 창제 당시의 타이포그래피는 당연히 세로쓰기였다. 알파벳을 맹종하면서 가독성 어쩌구 하면서 어느새 우리는 철저하게 세로쓰기를 폐기하고 말았다. 한자의 병기 역시 마찬가지. 언제부턴가 소설책에서 한자를 찾아보기는 어려워졌다. 한자어가 우리말의 7할을 차지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한자 병기의 이유는 분명하다. 그러나 한글 전용이라는 미명 아래 한자 병기를 마다함으로써 한글의 가치까지 훼손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책의 물리적 무게 또한 완성도 면에서 검토되고 결정돼야 할 중요한 요소다. 그동안 주목했던 '문켄'이라는 서적용지는 두꺼운 볼륨으로 특별함을 부여하면서 적절한 가벼움으로 종이책의 경쾌함을 준다. 468쪽짜리 '나목'한 권이 1㎏으로들고 있던 책이 발등에 떨어졌을 때 가벼운 찰과상을 입을 정도다. 다른 책이라면 이 두께가 보통 2~3㎏으로 떨어뜨렸을 때 발등이 깨진다. 책이 흉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우스개가 아니다.

이 같은 날렵한 책을 500질 한정판으로 만들어 각 권마다 일일이 일련번호를 찍었다. 중성 지질(紙質)에 견고한 양장 제본. 이 책이 오래도록 살아남음으로써 '나목'의 문학적 향기와 생명력을 오래 지켜 줄 외형을 부여하려 했다. 별책부록으로 만든 '나목을 말하다'는 책머리에 이 문학작품의 소재가 된 박수근의 그림을 권두화로 싣고, 박완서의 장녀 호원숙씨의 새로 쓴 '엄마의 나목'과 평론가 김윤식·김우종의 글 그리고 '나목의 달라진 표현 대조표'등을 수록했다. 1970년대 여성동아 부록판, 1976년 열화당판 그리고 현재의 세계사판을 일일이 대조했다.

실은 모든 글쓰기가 넓은 의미의 '자서전 쓰기'일 것이다. 학술행위이든 창작행위이든 심지어 마지못해 쓰는 아이들의 숙제일기까지도. '나목'그리고 박완서의 모든 문학 역시 그의 자서전의 일부가 아닐까. '나목'을 다시 가다듬는 일은 박완서의 완성도 높은 자서전을 위한 하나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