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파워블로거 남성, 알고 보니 임산부들과 친한 산부인과 의사

"요즘 '밥짓기'에 푹 빠졌어요. 재료로 뭘 쓰냐, 어떤 물로 밥을 짓느냐에 따라 결과가 천지차이니 신통하죠. 버섯밥 맛있게 만드는 법 아세요? 말린 버섯을 물에 불렸다가 그 물로 밥을 지으면 맛이 고급스러워져요."

"잡은 지 며칠 안 된 고기가 신선하다고들 하는데 그런 고기는 맛이 질겨요. 숙성이 잘돼야죠."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말만 들으면 동네 주부를 연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발언의 주인공은 의사, 그것도 대학교수다. 순천향대 구미병원 황인철(40) 산부인과 교수는 요리계 파워블로거로, 요리 마니아 사이에선 입소문이 난 인물이다.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 '아기 받는 남자의 아주 특별한 레시피'는 매일 평균 2000명이 찾아온다. 새 레시피를 올리는 날엔 방문자가 수만명에 이르기도 한다.

문화센터에서 요리강좌도 하고 있는 그는 작년 2월 서울 삼성동에 블로그 이름을 딴 카페를 차리기까지 했다. 커피 외에도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들어 제공하는데, 외래진료나 강의가 있어 카페에 못 오는 날을 대비해 대타로 설 처형을 집중 트레이닝시켰다. 올여름엔 요리 에세이 '아내가 샤워할 때 나는 요리한다(가제)'를 출간할 예정이고, 임산부 다이어트 요리책 집필도 계획 중이다.

요리에 대한 열정이 처음 발현된 건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이북 출신이신데 '남자는 절대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어요. 어머니가 외출하면 식사를 아예 거르셨죠. 아버지가 굶고 계시는 걸 보고 어머니 어깨너머 배운 실력으로 밥상을 차려 드렸어요."

냉장고에 있던 고기 반찬을 데우고, 계란 프라이를 한 것까진 좋았으나 소금 대신 미원을 친 것이 결정적 실수였다. 아버지로부터 "조그만 애가 가스불 앞에서 뭐하는 거냐"며 야단을 맞았지만 난생처음 누군가를 위해 요리한 일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중·고교 시절 캠핑·야영 때도 찌개 당번, 바비큐 담당은 항상 그였다. '인간이길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힘든 인턴·레지던트 시절에도 요리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잠시 눈 붙이기 전, 습관적으로 TV를 켤 때도 항상 요리채널만 틀었다. 먹고 싶은 요리, 하고 싶은 레시피를 틈틈이 메모한 것이 레지던트가 끝날 무렵엔 책 한권 분량이 됐다.

본격적으로 블로그를 운영하기 시작한 때는 2009년.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 여유가 생긴 뒤 요리를 시작했는데, 주변에서 "혼자 먹기 아깝다" "한번 팔아봐라"며 부추긴 게 계기가 됐다. "의사가 만든다고 하니 '몸에 좋은 음식 같아요'라고 신뢰감을 보이는 분들이 많아요. 직업 후광 좀 누린 거죠."

요리에 대한 '외도'가 본업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산부인과를 찾는 환자들은 으레 남자 의사를 꺼리기 마련. 하지만 황 교수가 외래진료를 하는 날이면 환자들이 "요리방송에 나왔던 그분이네?"라고 반색한 뒤 곧장 '주부들의 수다'로 이어지는 일도 빈번하다. 직접 키운 무·배추를 갖고 그를 찾아온 환자도 있었다. "채소는 어떻게 했냐고요? 감사한 마음을 담아 김치로 담가 먹었죠."

그러나 향후 목표를 묻자, 요리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남자는 곧장 본업으로 돌아왔다. "영양과 건강에 대한 논문을 쓰고 싶어요. 먹는 것이 임신중독과 임신당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관심이 큽니다."